몇 년 전부터인가 나는 새해가 되면 산을 찾아가는 습관을 들여놨다. 다행히 대구는 주위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쉽게 좋은 등산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겨울산을 올라가면서 숨을 멈춘 듯이 고요히 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겨울 색깔에 푹 젖어서 흙빛이 되어 있는 숲속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껍질까지 벗겨져 빈털털이가 된 고목들에게서 서글프다 못해 비탄까지 느끼게 하는 그 공허감에 도취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바로 그 기분에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처럼 가라앉아 있는 그 산이 사실은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생명을 배태시키고 물이 올라오고 싹을 틔울 거대한 잠재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새해의 겨울산은 더욱 더 강렬하게 텅빈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요즘들어 부쩍 자주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올해는 내가 30대의 마지막 해가 된 탓인 듯하다. 불과 며칠사이에 엊그제는 20대의 바쁜 학생이었는데 내일에는 곧 40대 중년의 시대라 선뜻 내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시간의 지속된 흐름 속에서도 단절과 구분을 지우면서 그 무엇인가의 또렷한 구분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유한한 삶에 대해 방향을 잡고 싶고 죽음 이후의 막연한 불확실성에 대한 저항감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중년을 조금 미리 상상해보고 준비하고 나의 삶을 중간평가 해야겠다는 다짐을 종종 한다. 내가 추구해온 삶의 여러 가지 목표나 욕구가 무엇인지 그것이 추구할 만한 것인지, 내가 도대체 어디쯤 가 있는지 길을 제대로 들고 있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을 깊이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사람만 보면 나는 붙잡고 묻곤 한다. 마치 어린학생처럼 말이다.
사람들에겐 별별 욕구가 다 있다. 한창 젊을 때는 책을 한 트럭쯤 읽어서 지식을 잔뜩 쌓아놓은 창고를 갖고 싶어하고 또 다른 창고에는 돈을 벌어서 쌓아봤으면 하기도 하고, 아니면 뱀탕이니 진기한 산삼 보약을 먹고 정력을 튼튼히 하여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도 있다. 또 다른 창고에는 자기 세력을 막강하게 해 줄 당파나 부하를 거느릴 창고, 내 자식들 학교 성적을 올리고자 하는 필사적 욕구도 있었다. 이들의 얘기를 듣고 중년의 사람들(장차 내 선배들이 될터이므로)에게 이제는 만족하는지 기쁜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대부분 어색한 웃음을 짓고선 고개를 흔들거나 아니면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나 자신이 약간 불안해졌다. 마치 나도 그때가 되면 그렇게 미궁 속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저주(?)를 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을 어느틈엔가 다 오르고 나서 내려다보다가 나는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솟아났다. 그토록 많은 노력과 욕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허무감은 마지막 창고 하나가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 창고는 나를 채우는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텅텅 비우는 헌신과 공동체를 위한 의로운 행위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창고인데 나이가 들게 될 수록 보다 절실하게 채워야 하는 마지막 남은 창고이기도 할 것 같았다. 그걸 깨닫지 못하는 한 계속 목이 마르고 불안하고 허무감에 빠질거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산을 빠르게 내려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