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바라거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십시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다 서로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금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가 가진 것을 서로 함께 나누어」 평화와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호소하셨다. 이것은 물질 재화의 소유를 위해 돌처럼 굳어만 가는 인간양심을 향한 경종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는 빈곤으로부터 야기된 민족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수억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생명보존의 위험을 받고 있다. 전세계 50억 인구 중 12억의 인구가 절대빈곤하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으며, 그 중 10억의 인구는 굶주림으로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있다. 매년 6백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간다.
오늘 하루에도 1만5천 명이 죽어갈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풍계는 그 자체로 명백한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조화로운 창조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빈부의 격차는 한 국가 안에서 그리고 세계적 차원의 경제구조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 세계 인구 중 20%의 인구가 세계 GNP의 83%를, 다른 20%의 가난한 사람들은 불과 1ㆍ4%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는 빈부격차. 이제, 이러한 경제적 불균형은 『인류의 양심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였음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지적하고 계신다.
비참한 빈곤과 궁핍을 빚어낸 빈부의 격차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이를 합법화하여 억압과 불의를 일삼게 되고 한편에서는 저항과 폭력으로 맞서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민족 전체를 생존의 위기에 몰아 넣는 내란과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비참한 상황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지켜보기에 한계에 이르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상황이 평화와 인권에 대한 명백한 위협일 뿐 아나라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욕임을 강도있게 지적하며, 가난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욕구에 부응하는 지속적인 관심은 물론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 비참한 상황을 개선할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당부하신다.
이를 위해 세계 경제구조의 개선에 책임있는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정부도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정책변화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 교회도 전통과 안정에 매달린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실천없는 복음의 제시에 안주할 수 없으며, 커튼이 내려진 회당안에서 양심에 따라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로 만족해서도 안된다.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또 다사 인내를 강요하며 빈약한 동정심으로 자선을 베푸는 거만한 부자의 모습이어서도 안된다. 더욱이 나자로를 부자의 식탁밑으로 안내하는 중개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교회가 진실로 변화를 선택하지 않을 때 가난한 사람들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이 비참한 현실상황을 가슴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실망하여 냉담의 벽을 쌓을 것이다. 그들은 가시관을 쓰시고 침뱉음을 당하신 가장 비참한 분이셨던 그리스도 앞에서, 신성모독죄로 단죄받고 배척 당하신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기에 장엄한 의상과 권위, 명성과 재물을 쌓아 놓은 교회를 싫어한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희망을 원한다.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빛과 진리 자체이신 그분을 따를 교회는 빛과 사랑으로 사회의 구석진 모든 곳에 울려퍼질 복음이기를 원한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길이기를 원한다. 빈곤한 이들과 양심을 가진 이들은 교회가 빛과 진리 그 자체이시며 사랑이신 그리스도에게 충실하기를 바라며 세상의 온갖 차별과 불의, 분쟁과 억압에 맞서 정의와 인간존엄성 수호에 투신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지난 20년간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이제 21세기를 복음화를 위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지침을 통해 발돋움을 하려 하고 있다. 교회의 내적쇄신과 성령의 역사속에 이뤄질 희망의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진실로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고통받는 사람들과 정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첫째,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가 정책적 변화를 가져와야 하듯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국 정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선진국에 비해 너무 미약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92년 사회복지비 예산은 총 예산의 6.7%에 해당되는 반면 선진국은 30%를 넘고 있다.
GNP 대비 1인당 사회복지비 수혜율은 불과 1.6%이며, 선진국은 26%들 넘고 있다니 보사부의 예산증가율이 8.6%(2조1천억원)인 반면 국방비 예산은 12.7%(8조8천억원)의 상승율을 차지하고 있다. 각종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은 교도소보다도 형편없는 예산으로 그 생활상태나 조건은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본당 예산의 10∼15%를 가난한 사람에게 배려하라고 하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이 수치에 못 미치고 있다. 어떤 교구에는 사회복지나 사회선교를 위한 기구도 설치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명의 전문성직자도 배려하지 않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할 교회안에 가난한 사랄들을 위해 일할 어떤 기구나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교회는 먹고 남는 것을 나누는 인색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가진 바를 나눌 수 있도록 예산을 배정하고 전문기구를 설치하는 사랑의 개혁을 해야 한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국경이나 종교를 넘어서 「주는 교회」로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 주교단 산하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 금년부터 서울대교구의 「한마음 한몸 운동」에 이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해외원조 기구가 설치되었음은 다행한 일이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조차 부끄러운 이 비참한 기아의 상황은 한국교회의 일부를 떼어서라도 나누어야 하는 긴박함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복음의 빛이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각 본당안에 지역을 둘러볼 복지기구를 설치하여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들을 돕는 방법도 자선적이고 시혜적인 차원을 넘어 함께 삶을 나누며 실제로 그들 스스로 희망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 참으로 복음 자체가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하여 나눔과 희생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사랑의 세계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새롭게 맞이하는 사회복지주일에 모든 교우들은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호소에 귀기울이길 원한다. 고통속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손을 사랑의 마음으로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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