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열차사고로 죽음보다 더한 장애와 합병증으로 삶에의 좌절을 겪어온 이종강(즈가리야ㆍ마리아수녀회 갱생원)씨가 입으로 쓴 수기를 연재한다. 이종강씨는 자신이 걸어온 길과 신앙을, 정상인의 글씨보다 더 알아보기 쉽고 반듯한 필체로 직접쓴 2백자 원고지 80매분량의 글을 본사로 보내왔다. 이 글을 7회에 걸쳐 소개한다.
내 스무살 젊음과 초록 빛 꿈이 5월의 신록처럼 싱그럽던 1981년 5월19일.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습기로 얼룩진 벽에 작업복 몇 벌이 어지럽게 걸려 있는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자취방에서 창으로 비춰드는 햇살의 눈부심 속에 아침을 맞이했다.
바람에 실려 은은히 풍겨오는 아카시아 꽃내음에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고,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은 그 어떤 일이라도 순조로울 것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평소에 씻기를 좋아하지 않는 고리 타분한 성격이었으나 그날은 서울엔 잠시 다녀오려고, 서둘러 목욕탕에 갖다 오고 세탁소에 맡겼던 옷을 찾아다 입었다. 그리고 몇 가지 옷을 가방에 꾸려넣으면 언제라도 철새처럼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취방을 나와 원주역에서 청량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힘찬 기적과 함께 원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초여름의 신록이 물결치는 산과 들을 뒤로뒤로하며 시원하게 달렸고, 원주와 청량리의 중간지점인 용문역에 잠시 정차했을 때는 많은 승객들이 승차하여 차내가 몹시 혼잡스러웠다. 그래서 바람이나 좀 쐬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승강구로 나왔다. 승강구로 나오니 지하수 물맛처럼 시원한 바람이 송송 맺힌 이마의 땀방울을 기분좋게 핥아주었고, 상큼한 신록의 향기에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아, 그러나 그 상쾌함,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뒤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먹구름이 0.5평 침상위에 이내 젊음을 꽁꽁 옭아맬 쇠사슬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차내로 들어가려고 쪼그리고 앉았던 승강구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미끄러운 승강구를 조심스레 딛고 있던 발이「미끈」했고, 중심을 잃은 몸은 폭풍우에 찢겨 나가는 여린 꽃잎의 아픔같은 짧은 비명을 메아리없는 허공에 흩뿌린채 열차 밖으로 날렸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넘나드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내가 깨어난 곳은 영등포에 있는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 회전침대 위에서였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천정에 매달린 링게르병을 보았고, 아픔에 몸부림치는 어느 환자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락가락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다시 얼마쯤의 시간이 무겁게 흘러가고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올바른 의식이 돌아온 후에야 내게 어떤 사고가 생겨 지금 병원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춥고 배고팠던 시절 8년여 동안을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낸 친구 ㅂ을 만나러가기 위해 원주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탔다가 달리는 열차에서 추락했다는 기억을 어슴프레 떠올릴 수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다친 것일까?』초조하고 답답한 심정에 누워 있는 침대로부터 몸을 좀 일으켜 보려고 몇번인가 힘을 써보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목 아래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다리가 어디쯤 어떻게 붙어있는지 감각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된 것이었다.
불길한 생각으로 잠시 머릿속에 복잡했으나「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을 만큼 현대의술이 발달해있고, 또 큰 병원이니 이깟 마비된 몸쯤이야…」하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곧 낫게 되리란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무척 비싸다는 병원비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의사가 와서 수술을 해야겠으니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좀 찍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수술이요?』무슨 수술이냐고 했더니 사고 당시 내 오른팔 뼈가 으스러져 계속 부패하고 있으므로 빨리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팔을 자르다니… 』둔기로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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