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었지 팔만은 못자른다고 울면서 소리쳤고, 절단하지 않고는 치료가 안되겠느냐고 애원도 해보았으나 모두 부질없는 일. 결국은 동의서에 지장을 찍고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수술실에서 감각없는 육신. 마취조차 할 필요없이 예리한 움직임 속에 오른팔이 몸으로부터 차갑게 떨어져나가는 것을 얼굴을 가려 놓은 수술보 사이로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두 팔을 다 가지고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이제 팔을 하나 잃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산단 말인가!』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보다 좋은 약은 없다고 처음에는 감당할 수 없이 컸던 팔을 잃은 슬픔도 어느정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마음이 누그러 들었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일에 사실 마음은 더 바쁘고 급했다.
마비된 몸이 하루 빨리 완쾌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며 뼛속을 파고드는 아픔도, 꼼짝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하는 답답함도 모두 속으로 참고 삭이면서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 차츰 회복되리라 생각했던 마비된 몸은 조금도 차도를 느낄 수가 없었다. 좀 더 시일이 지나면 나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내다가 하루는 회진을 온 담당의사에게『선생님, 제 몸이 언제쯤 완쾌되어 퇴원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담당의사는『글쎄요…』로 내 질문에 답변을 대신했고,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말할틈도 없이 바삐 병실을 나가셨다. 순간 잘못됐어도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 회전침대 위에 부러진 목뼈를 고정시키려는 무거운 추를 머리에 매달고 마치 석고상처럼 미동없이 누워있던 내 병명은「5~6번 사이의 경추골절로 인한 전신마비. 전신마비로 인한 갖가지 합병증으로 인한 갖가지 육신의 병회복 불가능. 단 합병증이 심하지 않을 경우 현 상태로 수년간 생명유지…」아마 이쯤 됐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나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온갖 추측과 상상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회진 시간을 기다려 재차 물었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담당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어『지금으로선 또다른 합병증만 생기지 않는다면 현 상태를 다 나은것으로 볼 수 있고,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으면 휠체어 정도는…』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그것은 차라리 사형선고보다 더 절망적이고 가혹한 형벌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엄청난 충격에 눈을 감으니 지나온 삶의 뼈아픈 기억들이 스크린의 영상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어머니께서 병으로(자궁암 이었다고 함) 돌아가셨다. 그리고 2년 후 아버지께선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외톨이가 된 나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작은집 식구들, 특히 작은어머니의 눈치를 견디기 힘들어 무작정 집을 나오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열한 살! 스스로 밥 벌이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며 살아야 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워가며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더러운 것을 피하는듯한 외면의 눈초리와 냉대밖엔, 그 누구도 나에게 딱딱한 빵 한쪽 나누어 주는 온정의 손길은 없었고, 밤에는 잠잘 곳이 없어 역대합실에서 추위에 떨며 밤을 보내야 했다. 그리하여 내가 밥벌이로 시작한 첫번째 일은 신문팔이였고, 그 후로 구두닦이ㆍ넝마주이 등 가장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하여 식당종업원ㆍ잡상인ㆍ공사판 노동일까지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그리고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다만 이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정해진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다가 형들에게 붙들리는 날엔, 허락도 없이 자기들 구역에 들어와서 구두를 닦았다고 때리고 그날 번 돈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끼니를 채울때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일종의 텃세였던 것이다.
잠자리 문제도 그랬다. 여름에는 춥지 않으니까 아무데서나 자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찬바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는 가장 괴롭고 큰 걱정거리가 바로 잠자리 문제였다. 몇 푼 안되는 벌이로는 허기진 배를 달래기도 바빴으니 하숙방을 얻는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그나마 겨우 찬바람 피할 수 있는 역 대합실에서조차 쫓겨나는 날엔, 눈보라치는 들녘의 짚덤불 속에 웅크린채 추위와 외로움에 떨며 악몽 같은 밤을 보내야만했다.
어떤 날은 형들에게 그 당시 내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던 밥통(구두통)까지 빼앗기고 3일을 꼬박 굶었더니 물로는 달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배가고파 두부공장 마당에 돼지먹이로 주려고 가마니에 담아 놓은 비지를 훔쳐다 먹고는 밤새도록 복통과 설사로 몸살을 앓아야 했으나,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몸이 아파도 내게는 편히 누워 쉴 방이 없었고, 약 한봉 물 한컵 떠다 줄 그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병을 이기지 못하면 곧 죽음이었다.
온갖 정성과 보살핌속에 아름답게 화단을 장식하는 화려한 꽃들의 생명력 보다 숱한 발길에 채이고 밟히어도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꿋꿋이 일어서는 잡초의 생명력이 더 모질고 강함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신의 섭리요 축복이듯이, 그 누구도 돌봐주는 이 없고,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할데 없는 힘겹고 고달픈 삶을 신께서 주신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꿋꿋이 버티며 나는 성장해갔다. 그리고 한 살, 두살, 나이에 나이를 보태감에 따라 추위와 배고픔도 그만큼씩 줄여갈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