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화창하던 어느날 오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단골고객 부부가 일하던 농부의 차림새로 다가섰다.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둘다 농아인 부부였다. 이 벽촌 두메에 언제 어디서 무슨 연고로 어떻게 흘러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두 내외가 남의 과수원에서 열심히 품을 팔아 개미처럼 알뜰히 저축을 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일을 못하는 날 또는 일찍 일이 끝난 때 해 저물녘이면 땀에 절은 옷차림에 어김없이 장화를 신고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 받은 품삯,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와 통장을 예금계 창구에 내미는 것이다.
그들이 올때마다 동료중 어느 누구 하나는 온몸운동을 방불케하는 수화를 해야만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었다.
그 부부는 남다르게 다정했고 어디를 가나 손을 맞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어두운 그늘이라고는 없었다. 얼굴 모습도 천진성과 소박함을 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도시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정직함과 근면함을 배울 수가 있었다. 주어진 악조건에서도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힘찬 격려와 박수의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 몇백원의 품삯으로 거금 30만원이 되도록 이 농아 부부는 몇 년을 열심히 저축을 해 왔다. 오늘도 예외없이 또 저금을 하려니 그렇게 생각하고만 있었다. 입금시킬 줄 알았던 우리들 앞에 도장과 통장을 내어놓았을 때 우리직원들은 크게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바로 수일 전 스물너댓 되어 보이는 딸과 똘똘해 보이는 어린 남매가 함께 와서 예금된 돈을 이미 인출해 갔기 때문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들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의아스럽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글은 고사하고 말까지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이해 시키는데 수화로 30여분 이상이 걸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순간 그녀가 분노에 일그러진 침통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괴상한 울음을 울부짖었다. 자식 잘못 두었음을 자책하는 한탄의 몸부림이 었다.
남편은 넋이 나간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뒤돌아 서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빛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직원들의 잘 잘못을 캐기는 커녕 원망 한마디 없이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있는 아내의 등을 토닥여 달래가 지고 세상살이에 달관한 사람처럼 근엄한 얼굴로 현관을 빠져나가 어깨동무하듯 부인을 부축하고 고개 언덕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떠난 사무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이었으며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우리들은 말 한마디 못한채 번민에 젖은 눈빛으로 그들을 전송하고 있었을뿐….
몇 달을 고민하고 우울하게 보냈던 나는 숫제「변상해 줄 것을」하고 후회도 해보았지만 강직하게 살아온 그들은 자기 탓으로 돌릴 뿐 누굴 원망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직장생활 20여년에 이렇게 가슴이 아팠던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 부부를 생각하면 안스럽고 송구하고 죄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내 탓만을 고집하며 검소하고 근면하게 이 땅 어느 과수원에서 백발의 노 부부로 열심히 살아갈 그들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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