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칠월, 내게는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언제부터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살짝 미치지 않으면 숨쉬기 힘든 세상살이가 돼버린것이다. 순리와 상식은 바늘 구멍 만큼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 유기체에서는 이미 마비와 혼돈에 가까운 중증이 엿보인다.
그러니까 80년 강제 해직 언론인이 됐던 7명의 동료가 옛 직장으로 명예회복과 함께 복귀한 것은 89년4월.
그리고 복직 보상금 청구 소송이 계류중이던 91년6월24일, 나를 제외한 6명의 복직동료가 공동투쟁각서마저 내 팽개친채 느닷없이 소송 취하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어 열흘 남짓 후에 회사에서 승진을 포함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이 가운데 소송취하를 한 4명은 승진의 영광을 안았고 2명은 그나마 탈락이었다.
인사 발령이 있었던 바로 지난해 7월4일, 일연의 미니 시나리오를 보고 배신의 분노를 삭이기에는 이 조그마한 가슴이 너무 옹졸한 탓인지 후끈 달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열받힌 칠월은 그래서 더욱 무덥고 후덥지근했다.
그 후 혼자서 공판이 진행되는 법정을 드나들면서 지난 여름은 유별나게 불별더위 처럼 느껴 졌다.
사람에 따라 삶의 가치관은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 있다.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고리 역시 물질 개념에 우위를 두는 형이하(形而下)의 수단에 의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반면에 형이상(形而上)의 수단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의 교분은 언제나 변함없는 고전적인 의리에 늘 가치를 부여 해 왔다. 인간의 관계는 정황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되고 그 사이에 덕목(德目)이 심어 진다. 군신(君臣)간의 충절, 부자(父子) 사이의 효도, 사제(師弟)간의 사도, 붕우(朋友)사이의 신의는 우리가 지켜야할 도덕적 규범인 것이다.
과거 전체 군주 시대에는 충절을 지키기란 어려웠던 일이었다. 지조와 절의를 고집하다가 사약을 받거나 귀양살이 끝에 목숨을 잃은 충신과 선비, 지식인들이 역사속에 섬광처럼 점철돼 왔던 터이다.
이와는 반대로 변신과 변절, 아부와 간교로 사직과 임금을 갈마들면서 총애와 영예를누린 인물도 적지 않았다. 옛 중국의 강나라 풍도(馮道)는 5조와 11군을 섬겼고 이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을 고변했던 정창손은 세종으로 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임금밑에서 녹을 먹었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 때 장관식에 올랐다가 4ㆍ19 혁명으로 실형까지 받았던 모씨는 6공화국에 이르면서 총리와 각료 그 밖의 공직을 두루 거치기도 했다. 역사 속에 충신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간신은 필요 악처럼 늘 왕권에 빌 붙어 살아 왔음을 눈여겨 볼수 있다. 알렉산더 왕은 자기의 죽마고우이며 생명의 은인이었던 클리투스가 간언이 심할 뿐 아니라 짐의 비위를 거슬린다는 이유로 근위병의 창을 빼앗아 그를 살해했다.
또한 자기의 업적을 미화해서 기록으로 남겼던 어용사가인 칼리스테네시가 알렉산더의 발 가락에 키쓰를 거절하자 자기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괘씸한 생각 끝에 그를 없애 버린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존심이 아프고 쓰린것은 짐의 쪽이 아니라 칼리스테네시 쪽이 아니던가.
이는 왕이 친구를 배신한 유명한 일화이다. 시저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브루투스가 원로원의원들과 함께 칼을 들이 대자『브루루스 너 마저도 나를!』하고 탄식했다. 권력의 배신은 또다른 권력을 향해 쉽게 변신한다.
그 뿐이 아니라 다 아는 얘기이지만 예수는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 가운데 두 사도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다(마르코14, 16ㆍ67ㆍ69ㆍ71). 사람들이『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오?』하고 물었다. 그러나 베드로는『아니오』라고 부인했다(요한18, : 25, 루가 22 : 54)유다 역시 예수를 배반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은것을 보고 자기의 죄를 뉘우친 끝에 마침내 목매 달아 주었다. (마태오27, 3)
그런데 예수의 거룩함은 이들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용서하는 사랑과 연민이었다.
어느덧 배신과 굴욕의 세월, 1년이 흘러 간다. 우직하며 미련스럽게도 매달 원고로서 공판정을 드나 들었다. 패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심을 하던 날 재판부 부장 판사와 배석 판사 3명 모두가 {}명의 동료가 왜 소송을 취하했느냐고 피고측 증인에게 묻기도 했다. 아마도 정의의 저울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마침내 지난 2월 원고 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하리 놀기를 일삼던 동료들은 나를 매욱 스럽다고 했을 것이다. 밀밭의 가라지는 한때 선한 농부를 속이고 기만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그 모습을 드러 내게 마련이다.
인간의 자존심은 그것으로서 잠시 밟힐 뿐 영원히 죽는 것은 아니다. 화해와 연민을 보낼 뿐이다. 새로 맞이하는 칠월은 그래서 무덥다기 보다는 한결 가볍고 시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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