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하나가 있다. 그것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보도 아니요, 희귀한 가치를 지닌 골동품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귀중품은 더욱 아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그것은 낡고 낡은「고개숙인 선풍기」이다.
이 선풍기는 우리집 식구가 된 것은 23년전 7월의 일이다. 그해 7월은 30도를 넘는 날씨가 4, 5일씩 계속되는 현상이 몇차례나 되풀이 되어 더위에 지치다 못해 선풍기를 하나 구입했던 것이다.
이녀석은 날개뭉치를 제외하고는 몸 전체가 쇠로 되어 있어서 요즈음의 산뜻하고 가벼운 모델에 비하면 아주 무겁고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다이알식 회전조절기가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약한 미풍에서 부터 센 바람까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바람방향의 상하좌우 각도조절, 높낮이 조정, 타이머기능까지 갖춘, 그 당시로서는 최신 고급모델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신혼 직후였으나 가전제품이라고는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처지여서 이 선풍기 하나만은 고가의 것을 구입해 스스로 위안을 삼곤했다. 집에 놀러오는 친구나 친척들에게도『○○사가 개발해 첫선을 보인 최신 모델』이라고 자랑삼아 얘기하면서 일부러 타이머를 작동시키기도 하고 바람의 강약도 이리저리 조절해 보여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녀석은 그해 뿐만 아니라 해마다 여름이면 변변치 못한 주인인 우리에게 시원한 바람을 풍성하게 일으켜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의 기운이 다했는지 3년전 여름 어느날 열심히 날개를 회전시키고 있던 이 녀석의 앞쪽 목부분이「덜커덩」소리와 함께 그만 부러졌다. 이 때문에 이 녀석은 날개뭉치가 쇠막대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흉칙스런 불구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가지 다행한 것은 다른 기능은 다 고장났지만 바람의 강약기능과 타이머 기능만은 예전 그대로 였다. 나는 하도 대견스러워서 이 녀석을 모양 그대로「고개숙인 선풍기」라고 이름지어 주고 계속 사용해오고 있다. 아이들은 이 녀석을 보고「우리집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선풍기잖아요? 이것 버리고 새것 하나 구입합시다」하고 성화지만 나는 이 녀석을 결코 버릴 수 없다면서 지금까지 완강하게 버티어 오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비록 패잔병같은 처량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수줍어 고개숙인 시골 새악시같은 모습의 선풍기. 20년이나 주인에게 열심히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던 녀석. 만약 사람같았으면 월급 올려달라, 보너스 인상해 달라, 휴가기간 늘려달라는 등 온갖 요구조건을 내걸고 투정을 부렸을텐데 이 녀석은 그 오랜 세월을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게 제 할일에 충실해 왔다. 비록 생명체 아닌 일개 물건에 지나지 않지마는 내 어이 이 녀석을 무정하게 헌 고무신짝 버리듯 하랴 이러한 나의 심정을 알아주기라도 하듯「고개숙인 선풍기」는 불편한 몸을 잠시도 쉬지않고 오늘도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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