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독자로부터 받은 한통의 전화가 며칠동안 나를 소화불량속으로 몰아넣었다. 여성이자 어머니이며 아내이기도한 그녀는 다짜고짜『서명을 해야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 주교단이 펼치고 있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 폐지 서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자인 그녀가 고민끝에 걸어온 이 전화는 같은 고민을 안고있는 많은 여성들의 같은 물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가임기에 있으며 이미 남매를 두고있는 그 여성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생각을 확고한 신념처럼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대부분이 함께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신념이 아마도 그녀의 서명을 망설이게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두명의 자녀를 두었으므로 더이상 아이를 가질수가 없다는 이 여성의 사고(思考)가 서명을 망설이게 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갖고있는 맹점중의 하나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대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상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이 통과 직전에 있다는 현실앞에서 이 문제의 당사자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선뜻 서명에 참여할 수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사실상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의 통과를 막기 위한 서명에 참가하는 행위는 별개의 문제일수가 있다.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교회가 제시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신자들에게 정확히 전달이 되었다면, 이같은 아이러니는 일어날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 신자 대부분이 아직도 낙태라는 과정을 가족계획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또 가톨릭교회가 제시하는 가톨릭적인 가족계획 방법이 신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백이기도하다. 따라서 낙태라는 방법을 통해 가족계획을 수립해온 수많은 가정에 있어 서명문제는 심각한 고민이 될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이다.
최근까지 심심치 않게 발표되어온 각종 통계자료들조차 신자 여성들의 낙태율이 비신자 여성들에 비해 오히려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생명수호를 최우선에 놓고 있는 교회로서 또 수태된 태아의 생명까지도 지켜야 한다는 원칙아래 교회가 취해온 일련의 활동에 대한 강력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태아의 생존권에 대해 교회와 신자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음을 이번 서명운동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한계로 인한 또 다른 불이익은 이번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교회는 이미 맛보았다. 대 사회운동으로 영역을 확대, 시도된 서명운동이 일반 매스컴으로부터 뜻밖의 외면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회일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손발을 잘 맞추어 주던 (?)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괄시를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수 밖에 없다.
무조건 교회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매스컴의 특성을 간파한 사실외에도 교회는 낙태와 관련한 대 사회적 교육에 소홀했다는 자책을 않을수가 없다.
지난 20여년간 이 땅이 낙태천국이라는 오명으로 유명 해지고 말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교회는 마땅히 책임의식을 가져야만 할것이다. 태아의 생존권에 대해 일찍부터 높혀온 목소리가 실제 생활속에 파고들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해야만 한다.
금지조항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동반되어야 한다. 아울러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1961년「인구문제와 산아제한」이라는 제목의 사목교서를 발표함으로써 낙태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한 한국교회 주교단은 1973년「모자보건법의 독소를 고발한다」는 내용의 사목교서를 발표하는데 이어 낙태가 모든 법의 원천인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사실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지속해왔다.
낙태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태도는 분명했지만 30여년간 간헐적으로 표출해온 목소리는 신자들의 생활속까지, 사회 구석구석까지 깊숙히 파고 들지를 못했다. 이윽고 하나만 낳아 잘살자는 구호가 우리사회 전반을 덮치고 있는 동안에도 태아를 살리고자하는 교회의 실질적 투자는 미약하기만 했다. 결국 한국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낙태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상 낙태를 허용하는 형법 제135조의 폐지를 들고나온 한국교회의 이번 서명운동은 낙태와 관련한 모든 것과의 싸움의 시작이다. 입법부와의 싸움, 사회와의 싸움, 인신과의 싸움, 그리고 교회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이 승리할 수 있기위해 한국교회는 교회의 모든 힘을 결집해야만 할것이다.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교회는「가톨릭적 가족계획 방법」이라는 대안을 강력한 무기로 사용할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낙태에 대항하는 가톨릭교회의 구체적 대안이기도한「자연적인 가족계획 방법」을 신자들과 또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죽어가는 태아를 살리기위한 주교단의 이번 서명운동은 이 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8월31일로 일단 막을 내리는 서명운동은 생명을 살리려는 한국교회의「큰 노력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보고싶다.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3백만 우리 신자들이 먼저「자신있게」서명할수 있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웃들에게 자신있게 권할수가 있을 것이다.『서명하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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