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디모테오 후 3, 16~17).
인간이 창조주의 뜻을 어겨 본래의 행복한 상태로부터 타락한 이래로 신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 회복, 즉 구속(救贖)의 경륜과 방법을 일러주었다. 이 점에서 인간 구속의 깊은 뜻을 비유로 가르친 구약성경은 방황하는 인간을 위한 교과서이자 길잡이라 할 수 있다.
문득 본보 칼럼 「방주의 창」을 적어나가면서 스스로 신의 섭리를 헤아림 없이 사견을 펴는 만용에 때로 두려움이 없지 않다. 이런 심경에서 노아시대의 홍수사건을 거론하는 까닭은 이를 통해 우리의 탈선을 재조정하는 것이 어느모로나 유익한 작업이라는 생각에서 이다. 알다시피 홍수사건은 구원의 기별을 등한하고 부도덕을 밥먹듯하는 무릇 인간으로 하여금 심판의 필연성을 제시하는 시범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하는 바 노아 일가를 태운 방주는 2월17일부터 퍼붓기 시작한 장대비로 불어난 홍수에 밀리다 7월17일에 이르러서야 겨우 아라랏산(山)에 기착할 수 있었다. 물이 줄어들면서 봉우리가 드러나자 이윽고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보냈으나 정작 감람나무잎을 물고 돌아온 것은 거듭된 확인 뒤끝이였고 더욱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은 이듬해 1월초 하루였다 한다.
이 같은 창세기(創世記) 내용은 신이 인간 역사에 임하시어 원래부터 의도한 창업에 대한 불멸의 의지를 재천명하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인생 역정은 보는 사람의 의중에 따라 만경징파(萬頃澄波)이며 한편 고해(苦海)일 수 있다. 사람이 살아오고 살아간다는 것이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도 같아 어찌보면 노아의 시련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지나친 말의 비약이 아니다.
노아시대와 현실 간에 떨어진 거리는 까마득하지만 인간이 생각하고 꾀하는 그 모두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반목과 시기는 저주받은 카인의 후예의 몸짓 그대로이며 또 다시 「홍수심판」을 피할 길 없다는 것이 뜻있는 이의 양심의 소리이다.
이 경우 누가 노아처럼 지명 받은 선민(選民)으로 거두어질 것이며 어디로 난을 피할 것인가의 추측은 저마다 아전인수로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다만 나름대로의 목적에서 배는 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속된 구제책에서 비롯한 일반적 처세관이 아닌가 싶다.
이 점에서 미루어보면 삶이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방주를 탄 처지에 비유된다. 그것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 아닌 거의가 아집을 채우려는 이기심에서 비롯한 측면이 없지 않다. 재물만을 탐하는 사람의 방주에는 의례 물욕을 가득 채울 것이므로 띄울 비둘기는 고사하고 그가 찾는 곳은 필경 「소돔과 고모라」 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권력만을 탐하는 사람의 방주는 오만 독선 배타로 메워졌기 때문에 그의 뇌리에는 오직 바벨탑(塔)의 환상만이 아른거릴 것이다.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방주가 아니라 오직 자기만이 살고자 하는 뱃길은 재물과 권력의 무게로 하여 난파를 면치 못한다. 이 세상엔 욕망을 모두 나를 만큼 덩치 큰 방주는 없으며 때문에 아집은 불행을 자초하기 마련이다. 이는 개탄할 추세이며 노아의 교훈이 퇴색해가고 있는 증좌이다.
그럼 아무리 인지가 발달해도 사람의 힘으로 이룩할 수 없는 일도 신의 역사는 이 불가능을 능히 실현할 기적을 지니고 있다. 그 힘이 바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다. 자신만의 생각은 편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남을 위해 구속하고자 하는 마음씨는 온 누리 사람을 다 태워도 모자람이 없는 방주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음으로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몸소 우리에게 시범하시었다. 사랑을 말할 때마다 바다처럼 넓은 기상을 연상케 하거니와 넓은 것은 여유를 말하고 포용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저마다가 지닌 방주를 점검할 계제에 이르렀다. 내가 살고자함에 앞서 이웃을 구속하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에서 명확한 뱃길을 키잡아야 한다. 항시 공동체로서의 소임을 잊지 말 것이며 그러므로써 뱃길은 순탄을 약속받을 것이다. 이 경우 시쳇말로 일컫는 「한국병」또한 더 이상 창궐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남이야 어떻든 나만은 호강하고 잘 살아야겠다는 뱃길은 비록 홍수는 모면했다 하더라도 태풍이 기다릴 것임을 비유로써 타산지석을 삼아야 한다.
끝으로 명심할 사실은 「방주의 창」은 내다보는 구실만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 또한 이어 강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모든 구조물에서 창은 빛과 기(氣)를 통하기 위해 존재하거니와 따라서 창문을 열수록 밝고 맑은 정신을 가꾸어줄 것은 분명한 이치이다.
우리 모두 험난한 인생 항로를 위해 조난에 예비할 방주를 띄우자. 그리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드릴 「방주의 창」을 활짝 열어 제치고 성경의 교훈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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