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막연한 기대였지만 그래도 새해에는 뭔가 좀더 새롭고 변화있는 삶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내던 하루는 최 누님께 편지를 받고 대필로 답장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바쁜 사람을 한 시간 이상 붙잡고 대필한 편지가 말과 글이 엇갈리고 엉망이어서 도저히 부칠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 스스로 편지를 쓸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목 아래로는 석고상처럼 뻣뻣이 굳은데다 오른팔은 절단되어 없고, 왼팔은 조금씩 움직였지만 마비된 손가락은 여전히 앞에 놓인 과일 한 쪽 입으로 집어나를 수 없으니 불가능했다.
이번엔 회복 불가능한 고장난 몸 중에서 아직 사용이 가능한 부분을 찾아보았다. 사고할 수 있는 머리, 깨알 같은 글씨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눈, 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입, 따뜻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다행히 이도 무척 튼튼한 편이었다. 그래서 입으로 펜을 물고 글씨 쓰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병실이라 며칠을 망설이다가, 다른 환자들이 모두 잠들고 간호사의 발길도 뜸한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엎드린 자세로 입에 펜을 물고 글씨 쓰는 (아니 그린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밤 딱딱한 펜을 물고 엎드려서 긴 시간을 씨름하다보면 이도 흔들흔들 아프고 목도 뻣뻣 아프고 턱밑에 생긴 물집을 터져 쓰리고….
아무튼 코피가 터지고 몸살이 날만큼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한두 차례의 꽃샘추위는 당연한 것이듯, 그것은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열심히 노트를 메꿔나갔다.
그러던 중에 퇴원얘기가 있어 1985년 4월, 13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은 도티병원에서 퇴원을 하여 다시 이곳 마리아수녀회 갱생원으로 오게 되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지사이로 조각조각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창가의 나무침대 위에 엎드려 글씨 쓰는 연습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턱밑에 물집이 생겨서 터지고, 쓰라림 뒤에 굳은 살이 생기고 하는 가운데 내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지 3개월, 그리고 몸을 다쳐 침상에 눕게된 후 처음으로 (비록 크고 작은 지렁이 기어간 자리처럼 꼬불꼬불하여 겨우 알아 볼수 있을 정도의 서툰 필체였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나종천회장님과 최 누님께 감동의 첫 편지를 쓸 수 있었다.
하얀 지면위에 내 마음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옮겨놓은 편지 쓰는 일은 보통 두 세시간씩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고장난 육신으로 살아야 하는 내가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또 작은 기쁨이나마 누구에게 나누어 줄수 있다는 생각에 그후로 편지쓰는 일은 내 삶에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다.
마리아수녀회 갱생원으로 온 후로도 나의 생활은 여전히 24시간 모두를 침상위에서 보내야 하는 답답한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이곳 식구들 모두가 이 못난 인간을 아껴주시고 따듯하게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고통의 신음소리가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병원에서 지낼 때 보다는 한층 밝아진 생활이었다.
그리고 내게 무엇보다 큰 기쁨과 위안이 되었던 것은 주일이면 휠체어를 타고 성당으로 미사참례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축복인가!
세월은 흘러 마음에 따르지 못하는 고장난 육신으로 침상 위에 눕게 된지도 강산이 변한다는 11년이 되었고, 찬바람에 떠도는 갈곳 잃은 낙엽처럼 오랜 방황을 해야만 했던 내 마음이 안착할수 있었던 이곳 갱생원에 와서 생활한지도 어느덧 8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간에도 병든 육신의 여러 합병증으로 병원을 오가며 두 번의 수술을 더 받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앞으로의 남은 생애도 많은 시련과 고통이 나의 삶을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 어떤 시련이나 역경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내 마음의 참된 평화를 흐리지는 못하리라.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너무나 못나고 부족함 많은 이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섭리였는가를 새삼 깊이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마치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마치든 누구나 다 자기 몫의 꽃과 향기와 열매가 있음에, 한 생명의 탄생과 삶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의 섭리이시다.
끝으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써 이 못난 인간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시고 많은 사랑을 나누어주신 나종천회장님과 최누님, 그리고 온갖 궂은 일에도 찡그림이나 싫은 소리 한번 없이 보살펴주신 수사님들과 수녀님, 사랑하는 갱생원의 형제님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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