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심장이식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보도와 함께 다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 뇌사에 대한 입법화란 것이다. 의학적으로 뇌사의 정의는 첫째 대뇌피질 기능의 소실 둘째, 뇌간 반사 소실(단 뇌사는 식물인간의 상태와는 다르다. 식물인간은 뇌간 반사가 있고 자발 호흡이 있다) 셋째, 불가역성의 증명이라고 한다.
1968년 시드니 선언 이후 국가와 지역에 따라 뇌사를 의학적 혹은 법적으로 인정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얼마 전 국내에서 뇌사자의 심장을 이식해서 성공했다고 해서 의사들이 알렐루야를 부를 상태는 아닐 것이다. 뇌사는 단지 사망의 시기를 판단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그것이 죽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의 임종과정과 죽음은 존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현세적 삶의 마지막 상태이고 최종적 자기 결단의 순간이기에 뇌사 이전에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의료계에서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과학기술이나 물질의 풍요에 있지 않고 이것을 개발하고 지배하는 인간의 윤리성에 있다. 왜 뇌사의 합법화를 추진하려고 하는가? 죽음의 판정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도라면 인정할 수 있으나 다른 목적성 즉 장기의 이식만을 위한 뇌사인정을 목적으로 한다면 의료기술의 발달 이전에 의료인들은 자신의 백색 가운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먼저 참된 인간으로 돌아와 더불어 사는 삶 가운데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윤리성 안에 한번 머물고 난 다음 다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기준은 인체의 어떤 부분이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통합체로서 인격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간생명이 아직 현존하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뇌사자는 4~5일 내에 심장사로 빠지며 길어야 수명이 2주라고 한다.
그러면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도 최소한 뇌사자보다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분명 오래 산다는 것(장수)과 잘 산다는 것(삶의 질)의 윤리적 가치판단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삶의 가치기준을 시간으로 판정한다면 노약자, 말기 암환자, 모든 종류의 시한부 중환자도 언젠가 장기이식의 필요성에 의해서 수술대에 올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억측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벌써 외국에서는 장기이식의 필요성 때문에 장기를 구하기 위해 제3세계 가난한 나라에서 장기를 돈으로 매매하고 있고 우리나라 같이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해서 먹는 심리가 팽배한 사회에 돈 많은 일부층이 건강과 장수를 위해 가난한 이의 장기 혹은 인신매매를 통한 장기구입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더 오래살기 위해 싱싱한 심장, 싱싱한 폐가 거래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오래전 영국에서는 해부학 발전을 위한 사체구입 때문에 살인사건이 많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얼마전에 일어난 경희 의료원 불임 시술소의 사건은 바로 이러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불임으로 고생하는 부부에게 아기를」이라는 과학적 기술이 둔갑하여 인간의 윤리를 짓밟으며 세상에 통용된다면 의술은 인술이 아닌 저질스런 상술로 변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뇌사의 판정을 의학에 맡기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엄격한 윤리적 통찰 하에서 이루어지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의학의 사명이 마치 죽음과 투쟁하는 즉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양 온갖 기술로서 환자를 실험대상으로 삼는 비인간적 행동을 의학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다는 것은 의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니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큰 이식수술은 특수치료이므로 의무적이 아니다. 그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환자에게 가져다 줄 이익과 많은 염려와 엄청난 의료적 노력 사이에 충분한 균형이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장기이식의 엄청난 투자를 통해 소수에게 제한된 삶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보다는 예방의료를 통한 더 많은 사람에게 의료 혜택을 베푸는 것이 더 정당한 것이 아닐까?
또한 법적인 측면에서의 합법화 시도에도 문제가 있다. 과연 국민 중에 얼마가 뇌사와 장기이식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법치주의 국가에서 다수결에 의해 제정한 법이 얼마나 많은 모순 속에 시행되고 있는가를, 그리고 법이란 필요성에 의해서만 제정될 때 부당한 수단으로 목적만을 채우려고 하는 법의 형태를 우리 민족의 역사속에서 보아왔기에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이 사회정의의 산물이라면 정의롭지 못한 법은 제정되어서는 안 되며 부정을 좌시만 하고 있는 지성과 논리는 무용지물이라고 하겠다. 요약하여 뇌사는 사망의 시기를 판정하는 하나의 의학적 방법이지 그것이 장기이식을 위한 합법적 수단으로 인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방주의 창」은 필자 사정으로 쉽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