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과학의 이름으로 신앙이 공격 받은 시대였다. 하느님도 영혼도 죄도 은총도 모조리 비과학적 망상이라는「과학적」비판에 일부 신학자들은 신앙은 이성과 무관하다는 이원론으로 답하려했다. 근대과학 앞에 신앙을「근대화」하려 했다 해서 근대주의라 불렀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근대주의가 공의회의 문헌에 정면으로 위반하면서도「공의회의 정신」이라는 허울 아래 되살아나고 있어 조심할 일이다.「정신」만 강조하는 풀이에 의하면「신앙의 예수」는「역사적 예수」와는 무관하고 부활도 제자들의 환상이다. 교의는 필요없다. 교회의 교도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성체성사는 상징이다. 신앙이란 각자가 성서에 비추어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신부는 신자 집회의 사회자일 뿐이다. 전례도 교의도 규율도 조직도 모두 우리가 새롭게 만든다. 등등「정신」내지 「쇄신」이라는 이름의 파괴라 할 만하다.
신근대주의의 공격 목표는 가톨릭 신앙의 특징인「성전」이다. 저들은 교회의 가르침은 역사와 더불어 변화해야 할 것이며, 교회는 옛 도그마로 화석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럴싸하다. 그러나 참 전승은 화석화한「골동주의」가 아니다.
가톨릭 신앙의 유산은 새로운 문제와 대결하여, 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불변의 사도 전래의 신앙을 새로운 형태로 보다 다면적으로 보다 깊게 정의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발전하는 전통이 아니던가?
신근대주의의 활개로 교회가 거품 상태로 빠져가는 오늘날, 신앙의 유산을 사랑함이 공의회를 참으로 사랑하고 아울러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신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지?
우리가 거룩한 것을 바꾸는 것은 개혁이라는 이름의 파괴요, 거룩한 것에 의해 우리와 사회가 바뀌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쇄신에 합당한 것이 아닐런지? 신앙의 유산이라는 환경의 보호없이는 영혼이라는 나무는 클 수 없지 않는지? 『오래된 것이라 이젠 낡았다』가 아니라 『오래된 것이라 더욱 신선하다』는 신앙 감각을 회복할 필요가 있지 않을런지. 일요한담을 마감하면서 신자들께 던지고 싶은 물음들이다.
<교수ㆍ전남대 법과대학>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