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주간동안 우리는 「독자의 광장」 투고를 통해 전신마비로 0.5평 침상위에서 지난 11년을 살아왔고 또 그렇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할 금년 31살의 이종강을 만나왔다.
『대부를 언제나 부끄럽게 하는 대라』라고 핀잔아닌 핀잔을 주면서 그와의 만남을 늘 감사해왔던 나로서는 「입으로 엮어보는 나의 삶 나의 신앙」, 이 글을 대하는 감동이 유별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맹인선교회에서 한강성심병원으로 매주 환자방문을 하면서였다. 지난 79년 맹인선교회를 설립하던 그해부터 우리는 몇몇가지 활동 계획중에 병원의 환자방문을 그중의 하나로 설정하고 수년째 그 활동에 참여해 오고 있던 어느날 어느 중증환자실 회전침대위에 엎드려 있는 그를 처음 만났다. 너무나 말이 없는 그인지라 도모지 말을 붙혀볼 수도 없이 1년쯤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완강하기만하던 그에게서 점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마디 간단한 인사에 응해왔고 이내 대화의 길이와 폭은 늘어갔다. 방문때마다 들려주는 교리에 관한 이야기에도 관심을 보이고 통신교리에도 등록, 마침내 수료증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0.5평 침상위에서 단 한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는 그를 어떻게 성당에 데려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당시 맹인선교회의 주일미사를 집전해주시던 반예문 신부님께 상위를 드렸다. 사정을 듣고난 신부님께서는 기꺼이 병원으로 가서 세례를 주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종강은 그날 또 한명의 다른 전신마비 환자와 함께 병실 침상위에서 세례를 받을수 있었다.
종강이 한강성심병원을 퇴원 마리아 수녀회 갱생원으로 옮겨가게 된 뒤 우리는 예전처럼 그를 자주 만날수 없게 되었다. 갱생원은 외부 인사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수시로 겪어야 했던 합병증으로 도티병원, 또는 영등포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우리가 그를 찾아가는 외에는 편지만이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로부터의 편지가 갑자기 필체가 바뀌었다. 여태까지는 다른이의 대필로 보내여져오던 그의 편지가 이제는 자신이 입으로 펜을 물어 직접 써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편지를 내게 읽어주는 이에게 물어보았다. 『필체를 알아볼만 하냐』고. 그러나 답은 『제 필체보다 나은데요』하는 것이었다. 믿어지지않아 다른이에세 다시 그 편지를 보이며 똑같이 물어보았으나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그후부터 나는 계속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쳤을지 모르는 그 입으로 쓴 편지를 받게 되었다. 대부의 안부를 묻고, 또 그때 함께 병원 방문에 참여했던 봉사자들의 안부도 묻고, 휠체어 타고 처음 성당에 갔던 일, 그곳 갱생언에 그가 처음 열차사고를 당했던 그때부터 아카시아가 만개하여 그 향이 얘기를 감싸고 있다는 이야기하며 그곳 소신부님의 건강에 대한 걱정, 보살펴주는 수사님들의 고마움에 대한 이야기. 그 수도회의 첫 사제 탄생소식, 그러면서 그가 얼마나 더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것을 역력히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그의 기도생활에 관한 이야기 등 수없이 많은 소식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 한강 성심병원으로 매주 그와 그리고 그와같은 부류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가 하는 것을. 그들의 찢기우고 부서지고 망가져버린 생명들 안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주간의 삶의 힘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얻고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약함과 가난함 속에 더욱 강하게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종강과 그와같이 육신으로 상처나고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은 이들의 삶은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을 위로하고, 힘을 주며, 실제로는 눈멀고 귀멀고 무지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그런줄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면서 여기 부딪치고 저리 깨여지며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죽어가는 이땅의 모든 「영적 장애인」을 깨우치는 은사임이 분명하다.
지난 11년간 종강은 0.5평 침상위의 삶을 통해서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처럼 그의 고통을 이웃을 위한 기도로 바꿀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 또한 세상 모든이는 각자 자기 몫의 꽃과 향기와 열매가 있음도 배웠다. 물론 그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펜을 입에 문채 오늘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자신이 이미 체험으로 알고있는 하느님이 주시는 온전한 평화가 그에게 남은 생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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