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맞았던 지난 1984년은 한국교회 최대의 해였다. 전세계 교회가 부러워하고 축하하는 가운데 103위 한국 순교성인이 자랑스레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날의 감격을 생생히 가슴에 묻고 성인탄생을 위해 바쳤던 수많은 기도와 희생들을 기억하고 있다. 9월 20일 성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그 감동을 되새겨보기 위해 당시 로마에서 직접 시성작업에 참여했던 CCK 사무차장 윤민구 신부의 숨은 얘기를 게재한다.
오늘은 (9월 20일) 우리나라 성인들의 대축일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축일은 본래 9월 26일이었는데 시성식때 9월 20일로 옮겨오게 되었다. 교황께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셨던 1984년 5월 6일에 서울 여의도 광자에서 시성식이 있었으니 올해로 우리나라 성인들의 대축일을 아홉번째로 맞게되는 셈이다. 시성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마에 있으면서 시성 청원자(Postulaor) 역할을 했었는지를 소상히 밝혀보라는 요청이 있었다. 언젠가는 더욱 체계적으로 로마에서 우리나라 성인들의 시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여기에서는 그냥 시성식에 얽힌 뒷 이야기나 몇마디 할까 한다.
■ 성인축일의 변경
먼저 이왕 말이 나왔으니 바른 순서는 아니겠지만 성인 축일이 변경된 것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기로 하기로 하겠다.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나라 성인들이 아직 시성되지 않았던 때, 즉 아직 복자이셨을 때 이분들의 축일은 9월 26일이었다. 이렇게 정해진 까닭은 다음과 같다. 기해대박해(1839) 와 병오대박해(1846) 때에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79위가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셨는데 이분들 중에 9위의 순교일이 9월 26일로, 이날이 가장 많은 분들이 순교하신 날이기 때문에 이날을 축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79위 중 33위가 9월에 순교하셨기 때문에 9월을 복자 성월로(지금은 순교자 성월) 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순교자들이 시성이 결정된 후 우리나라 성인들을 전세계의 모든 교우들에게 알리고,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전례력에 우리 성인들의 축일을 삽입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성인이 된다고 모두 전세계 전례력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황청 전례 담당부서인 예부성에서는 과거에 너무나 많은 성인 축일이 전례력에 들어와 있어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이를 정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전세계 전례력에 새로운 성인들의 축일이 삽입되는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예부성에서는 시성이 되더라도 새 성인과 연관이 있는 지역교회나 수도회의 전례력에만 축일을 포함시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곳에서나 새 성인들을 열심히 공경하겠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부성의 바램을 넘어 우리나라 성인들의 축일을 전세계 전례력에 포함 시키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우선 축일이었던 9월 26일은 고스마와 다미아노 성인들의 축일이다. 이분들이 교회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보아 아무리 우리 생각에 우리나라 성인들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분들 대신에 우리 성인들 축일을 전세계 전례력에 삽입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숙고한 끝에 축일을 바꾸기로 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을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9월 20일에 두번째로 많은 7위가 순교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교님들과 상의한 후 성인축일 변경에 관한 공문을 작성하여 들고 예부성을 찾았다. 전세계 교회력 삽입 문제는 전세계 교회력 삽입 문제는 꺼내지도 않고 축일변경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벌써 예부성 실무자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교황님께 직접 청원을 드리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결국 교황님께서 윤허하셔서 축일이 변경되어, 9월 20일에 우리나라에서는 대축일로, 그리고 전세계 교회에서는 의무 기념 축일로 우리나라 성인 축일을 지내게 되었다.
■ 고마우신 시성성,고위 성직자들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릴까 한다. 1928년 가을 당시 시성추진위원회 위원장이신 김남수 주교께서 로마에 오셔서는『국내에서는 한국교회 설립 2백주년이 되는 1984년에 시성식이 있는 줄로 알고 많은 신자가「유해 순회 기도회」등을 하고 있는데 로마에서는 별로 진척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는가!』하시며 큰 걱정을 하였다. 주교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었으나 그때는 학위 논문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기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못드리고 논문을 속히 마치기 위해 매진하였다. 논문이 어느정도 끝나갈 무렵인 1983년 초 결국 시성 청원자가 되게 되었다. 임명장과 이력서를 들고 시성성을 찾았을 때 처음으로 만난 분은 지금은 저 세상에서 우리 성인들과 함께 영복을 누리고 계실 당시 시성성 차관 크리상 대주교이셨다. 한국 순교자 시성을 위한 시성 청원자로 새로이 임명바다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대주교께서는 친절하게 당신 사무실로 안내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시성 관계일이었지만 나 자신 교회법을 전공한 사람도,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럴때마다 친절하게 도와주신 분들은 시성성 장관、차관、서기관 등 고위 성직자 분들이셨다. 이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동동차에서부터 공문서 작성에까지 모든 것을 너무나 자상히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이분들만 믿고 매주 서너차례씩 무조건 시성성을 들락날락 하였다.
하루는 크리상 대주교께서『이력서의 나이가 정말이냐?』고 물으셨다. 그래서『그렇다』고 대답을 드렸더니『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바티깐에서 일했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동구권 출신이셨던 그분은 일찍이 교황청에서 일하시게 되어 그때 이미 35년 이상 근무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꼭 시성은 되어야 한다며 부지런히 찾아오는 동양의 젊은이가 귀여워서 친절히 도와주셨던 것이다. 사실 다른 나라나 수도회의 시성청원자는 모두 나이가 드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시성에서 일하시는 분이나 시성 청원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어렸던 것이다. 그래서 귀여움을 받았고 일이 잘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김수환 추기경께서 로마에 오셔서 시성성을 방문하시고 장관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우리나라 시성건이 속히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부탁을 하셨다. 시성성 장관은 이 자리에서도 절차를 잘 모르는 한국 교회를 위해 필요한 서류 몇가지를 보충하도록 알려주셨다. 옆에 함께 있었던 나는 일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한 묘안을 생각해 내어 서기관을 거치지 않고 장관 추기경께 직접 서류를 제출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돌한 부탁이었는데 장관 추기경께서는 놀랍게도 기꺼이 이를 승난하셨다. 이런 편법을 생각하게된 이유는 이러했다. 처음 서기관 몬시뇰을 찾았을때 그분은 우리나라 성인들의 시성건을 당신이 갖고 계시던 서류중에서 쉽게 찾아내지 못하셨다. 그만큼 우리 건은 관심 밖의 그리고 잘 준비된 시성건이 접수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건만 빨리 진행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서기관에게 접수된 서류가 장관까지 가는데는 자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경험하였던터라 이런 억지 청원을 드렸고 승낙을 얻었던 것이다. 이후로는 무례하게도 장관 추기경 방문을 여러번 직접 두드렸다. 그리고 서류를 건네드리고 또 다른 지시를 받곤 하였다. 그리고 장관방을 나서면서는 언제나 다시 여쭈었다.
『다음에도 또 직접와도 되겠습니까?』장관 추기경님은 늘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런 편법이 우리 시성건이 빨리 진행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믿고있다.
■ 기적 문제
시복을 위해서는 최소한 두번읭 기적이 요구되고 시성을 위해서도 두번의 기적이 요구된다. 기적은 시복이나 시성 후보자의 덕을 하느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순교자의 경우에는 한번의 기적은 면제될 수 있고 또 교황께서는 한번의 기적을 관면할 수 있다. 우리 성인들의 경우 시복때 이러한 이유에서 기적에 대한 심사없이 시복되셨는데 시성때도 순교자들이시니까 한번은 면제될 수 있고 다른 한번의 경우가 문제가 되었는데 시복때 이미 교황께서 관면을 하였으니 다시 또 관면하시는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롸 형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큰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분이 장관 추기경이셨다. 그분은 어느날「기적심사 관면」을 청하도록 하라고 알려주셨다. 기적관면과 기적심사관면은 다른데 전자는 기적자체에 대한 관면이고, 후자는 기적이 있기는 한데 교황청에서 심사하는 기준에 맞추어 기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심사를 관면하는 것이다. 그만큼 교황청 기적심사는 엄격하다. 그래서 기적심사관면 청원서를 교황님께 제출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작성되었다. 우선 기적을 윤리적인 기적과 물리적인 기적으로 구분하고 윤리적인 기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늘고있는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 그리고 예비자의 증가 또한 열심한 신앙생활과 평신도 사도직 활동 등을 열거한 후 이것이 모두 순교자들의 덕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증면하려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그렇다고 물리적인 기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이를 증빙할 보고서 작성이 어렵기 때무에 기적심사 관면을 청하오니 윤허해 주십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당시 보고된 3가지 기적적 치유에 대한 것을 보고하였다. 교황님은 이를 윤허하셨고 이리하여 가장 어려웠던 기적 문제가 해결되어 시성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조상덕으로
이렇게 몇마디 적으면서 끝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 우리 성인들의 시성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이 너무나 훌륭하시기 때문에 후손들인 우리가 벼로 준비하지 못하였는데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밖에도 많은 경우「조상탓」이 아닌「조상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정신차릴때가 된 것 같다. 언제까지 조상덕만 믿고 지낼것인가! 실력을 갖추돌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잘못하면 조상들께 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참된 진리를 스스로 찾았고, 이를 잘 지켜 우리에게 넘겨 주셨기에 이를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지만 우리가 잘못하면 정규과정을 밟지 못하고 어깨너머로 배운 탓에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서 저렇게 엉터리라고 남들이 공연히 선조들을 욕할까 두려운 것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대축일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고, 우리 교회의 실상을 직시해야 할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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