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렇게 직접 펜을 들게 된 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 무언가 특별히 느끼고 생각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네 인간사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두가지 즉 절망과 소외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찌기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갈파한 바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 이외에도 한가지 더 있다고 봅니다. 바로 소외라는 실재입니다. 따라서 자리에선 주로 신앙생활 안에서의 소외라는 문제를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절망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반대개념이라 한다면 소외라는 실재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사랑의 나눔인 친교의 반대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절망과 소외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우리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신앙과 영성의 성숙과 심화에 결정적으로 건립돌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어떤 자매로 부터 우연찮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 잠시 본당활동했을 때 같이 활동했던 모자매가 타락(?)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불행은 십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때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활달한 성격까지는 좋은데,꽤 수다스럽고 또 그 수다는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릴 줄 모른다는 이유로,주변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매번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나의 돌파구로써 나이트크럽엘 혼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커다란 불행과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초래할 줄이야…. 후에 속은 것을 안 그녀는 그 남자에 불타는 복수심으로 뭇남자들을 상대하는 쪽으로 아예 들어섰다고 합니다. 참, 사람의 미래는 한 치앞을 모른다더니….
그런데 이와같은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한 자매의 불행을 거울삼아, 우리의 주위를 새삼 살펴보고 생활해볼 명분을 갖게된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먼저, 저 경우 수도생활하는 사람으로서 힘겹고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인간관계에 따르는 극도의 소외감이란 것이 있습니다. 자주는 아닐지라도 공동체내에서 주위형제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되거나 느껴질 때 절망감에 젖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지옥( ? )에서 왜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야 하나!』푸념하면서 말입니다. 이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는 경우도 이따금 발생합니다.
다음으로,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부 각자가 전인격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못할 때,부부관계는 당연히 원만할 수 없습니다. 원만하지 못한 부부 관계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삐뚤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소외감을 안겨줍니다. 『우리 부모는 나를 미워하고 있다』『나는 우리 부모에게 귀찮은 존재다』『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학교성적을 사랑하고 있다』일반적으로 볼때 부모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은 다분히 문제의 소지 (일찌감치 이성이나 성의 문제에 눈을 뜬다거나,사회의 기존가치체계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지나친 이기주의나 성공 컴플렉스에 빠져 일찌기 누리지 못했던 사랑을 보상받으려는 기형인간이 됩니다) 를 안고 있습니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부부 사이에는 정숙치 못한 배우자가 마치 구더기 생기듯 생기며, 이로써 결혼의 신성한 언약은 깨집니다. (마태 19, 6)
마지막으로, 본당의 경우도 하등 다를바가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그 자매의 경우와 동일한 예는 유사한 예는 쉽게 주변에서도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과 각자가 활동하는 신심단체 그리고 성당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삶의 모토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한다는 이유와 친교의 거부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가난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이든 혹시 소외당하며 단체활동이나 성당에 숫제 발을 끊은 교우들은 없습니까.
가톨릭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친교란 사랑의 나눔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다음의 복음말씀과 부합될 때 올바른 크리스찬적 사랑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태 5, 46). 이 말씀과 같이 실천하게 될 때 앞서 언급한 불행한 그 지매와 같이 친교의 공동체내에서 소외감으로 더는 예는 찾을 수 없게 될것이고, 이미 와있지만 아직은 완선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한 발짝 더 완성에로 다가갈 것이며 사랑과 싸움, 기쁨과 봉사, 친교와 감사의 공동체가 이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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