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나의 외가집 뒤에는 사과밭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아슴하여 과수원의 면적이나 과일 맛이나 종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과꽃이 흐드러지게 된 뒷결을 돌아 쪽문으로 나가면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큰 과수밭이 있던 걸로 기억된다. 과수밭을 지나 한참가면 밤밭이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어 외갓동네 사람들은 외가집을「큰기와집」혹은「과수원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 과수밭을 마지막 밭을 들여 놓았던 것은 일곱 살 나던 해 여름이었다. 월남하기 얼마 전, 어머니와 이가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후 월남하여 45년여가지난 지금, 새삼 외가댁 사과나무를 떠올리게 된것은 8월말 안동교구에 가서였다. 안동교구 성소후원회의 일원으로 안동교구를 방문하게 된 나는 80여명의 회원과 함께 청송 교우님댁 사과밭에서 사과를 딸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7년 전에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던 자갈밭을 손발에 피멍이 들도록 개간하여 오늘의 사과밭을 일군 교우님에 대한 존경심도 컸지만, 나는 일곱살때 내고향 평양에서 디뎌보고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사과밭에 내 발을 올려 놓을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더 뛰었다.
주먹만한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으로 안내된 우리 회원들은 주인의 설명은 듣는둥 마는둥 사과를 주저없이 따서 사과나무 밑에 놓여 있는 광주리에 담았다. 손끝에 와닿는 사과알의 싱싱한 감촉과 빛깔에 감탄하며 이브가 뱀의 유혹이 없었다해도 사과를 따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겁없는 생각까지 해가며 사과를 척척 따서 광주리에 넣는데, 아뿔사! 사과밭 주인인 교우님의 자지러진 목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아이고, 우짤꼬? 그건 따는기 아닌기라요!』
우리가 따놓은 사과알을 소중히 들어올리는 교우님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아닌가.
『이건 겨울사과라요. 딸 수 있는 건 저기 있는데…』
겨울사과알을 양손에 들고 어쩔줄 몰라하는 교우님은 경기하는 아이를 안고 쩔쩔 매는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신들린 사람처럼 따던 일손 (?) 을 멈추고 부끄럽고 난처한 몰골이 되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야 했다.
속어에 있는「안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농천 사정에 어두운 우리가「사과따기」라는 너무나 낭만적인 단어 하나만을 귀에 담고 품종도 가려볼 겨를없이 사과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만 따면 농촌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TV나 신문지상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입력된 농촌 일손 부족 현황이 우리로 하여금 앞뒤분간 못하게 한 원인도 컸을 것이다.
도시집중화로 젊은이는 모두 도시로 도시로 몰려가고 50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오늘의 농촌속에 서있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사과따기」라는 아름다운 단어만 머리에 담고 농촌땅을 밟은 나 자신이 바로「농촌공해」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마 나의 외할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계시다면「사과따기」를 즐거운 놀이쯤으로 생각한 오십이 넘은 철없는 외손녀를 혼내기 위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천리길을 쫓아 왔으리라.
안동교구를 떠나 오며 버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농촌 풍경에 나를 담그니 철없는 도시 여인들이 따놓은 겨울사과를 든 교우님의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 여름 햇빛이 되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자주 농촌을 찾아가 농민의 고통과 그들의 일을 내것으로 하기 전에는「사과따기」같은 웃지 못할 촌극은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마음만이라도「매일농부」가 되어「우리 농산물 살리기 운동」에 일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자꾸 부끄러움이 앞서는 건 내가 철저한 도시인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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