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무산방면에서도 일본군 토벌대가 도하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쌍방에서 기다리는 소식이 왔고 일군의 숫자도 대강은 알게 되었다. 장군으로부터 모든 부하에 이르기까지 긴장된 순간이었다. 여기서 다시 모인 장군들에게 두 편으로 가르고 부하들도 양편으로 갈라놓고 한 편을 무산으로 들어오는 토벌대와 싸우고 다른 편은 회령서 들어오는 일본군과 싸우도록 배치하였다.
청산리는 인적이 드물고 작고 큰 야산이 많고 길가에는 숲이 우거지고 고개는 둘이 서로 마주보는 곳이었다. 무산방면과 회령 방면으로 파견된 독립단은 적고 큰 산을 끼고 일본군이 오면 쏘고 도망치는 작전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청산리로 유도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이란 몇 명 되지도 않고 싸움보다 도망을 잘하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고 우습게 넘기면서 청산리로 향하였다. 기다리던 전투명령이 내렸다. 전 독립군은 일시에 사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에선 2개 부대가 무너졌고 후속부대가 땅에 부복하며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관총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니 일본군은 잠깐사이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지휘관은 독립군부대가 예상보다 큰 부대인줄 알고 제일 뒤에 오는 중화기부대에게 대포를 쏘라고 명령하였다. 고개정상과 고개 너머까지 대포사격이 시작되었다. 고개 너머에서 싸우던 일본부대는 대포사격을 받으니 같이 대포 사격을 하였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때 모든 독립군에게 산 정상을 향해 퇴각 명령이 내렸다. 일본군끼리 대포로써 격전을 벌어 시체가 부지기수였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던 독립군들은 하느님께서 도우셔서 우리에게 큰 승리를 주셨다고 감사를 드렸고 감격하여 우는 이도 많았다.
일본군의 부상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시체가 2천3백구 가량이었다고 후일에 소식을 들었다. 용정에 있는 영사관에서 중국마차와 소달구지를 보내서 3일간 부산방연과 두만강까지 실어갔다고 한다. 조선땅에서 만세를 부른다고 학살했던 그 복수를 북간도에서 톡톡히 갚은 셈이 되었다.
1920년 여름에 명월구성본당에서 박 회장님과 방운룡씨를 뵈었을 때는 일본군이 만주에 침공하여 청나라 마지막 왕의 태자 선토제를 만주왕으로 세우고 만주국을 건설할 때였다.
그 당시 경백호 근방 원시림 속에 공산군 4만 명이 집단생활하고 독립군에서도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때 일본군 토벌대는 비행기로 폭격을 연일하고 지상군부대가 침투하니 독립군에 서도 소련국경을 넘는 이들이 많았다. 방운룡씨와 박창재씨는 소련 국경을 넘으면 공산당이 될 것이고 상해로 가려니 십중팔구 일본군에게 잡힐 것이고 오히려 신앙생활틀 위해서 자수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부하들은 제 집으로 들아가게 하였다. 고향있는 처자를 불러 가정을 이뤘을 때 방운룡씨의 부인은, 40세정도인데도 고생을 많이 하여 할머니처럼 보였고 유복녀 17세 소녀를 데리고 있었다.
박창재 회장은 마흔 된 나이인데도 젊어 보였고 후에 첫 아들을 낳았다.
두 분의 북간도 이야기와 청산리 전투 이야기는 듣는 이들에게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했고 신앙심처럼 일생 마음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북간도에 있는 경계비
북간도 용정 해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북간도는 한국땅이다」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그 선생님은 대구에서 오셨고 성함은 김구정씨였다. 해성학교 교가를 직접 작사 작곡을 하였으며 전교 학생들은 매일 우렁차게 그 교가를 불렀다.
그 후 나는 신학교에 갔었고 방학이 되면서 용정에서 명월구로 이사하였으니 명월구를 찾아오라는 편지를 받고 용정서 1백30리를 걸어서 명월구에 갔다.
본당 신부님은 박 신부님이셨다. 본당 회장은 박창화씨였다. 본당 회장이면서 해성학원의 선생이었다. 그 분은 역사에 밝고 인물도 좋은 분이었다. 토문강가에 경계비에 대하여 나는 처음으로 들었고 자기가 경계비를 찾으러 먼저 해룡강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하고 토문에서부터 토문강을 답사하여 연길 노두구 차조구까지 찾았으나 실패하고 명월구에 와서 토문강가로 수차 산보삼아 다니다가 넓은 벌판이 전부 논밭이고 강에서 십보정도 떨어진 곳에 약 78m정도 높이의 작은 산이 있어 혹시나 하고 들어가보니 나무가 꽉 차있었고 그 속에 풀이 한길이나 되는데 간신히 헤치고 올라가보니 한길이 넘는 비석이 있었다. 숲속이어서 어두침침했으며 비석에는 이끼가 덮어져 있어 글자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큰 못과 쇠꼬쟁이 나무꼬쟁이 등을 충분히 준비해가지고 글자 한자 한자씩 찾아내고 3일간 고생한끝에 이 비석이 과연 수십일 동안 찾던 경계비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청나라연도와 단군연도, 양국의 대신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회장님 설명에 의하면 백두산에서부터 안도현과 하발령을 서쪽 경계로 하고 동은 훈준현과 왕청현을 정계로 하고 북은 연길현을 경계로 하고 해룡강과 토문강 유역의 북간도는 조선땅이다라는 것을 해독하였다.
현재 중국은 청나라의 역사도 잘 알고 북간도의 오랜 과거의 역사도 잘 알기 때문에 한민족의 자치구역으로 설정하고 자유로이 살 수 있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ㆍ중 수교로 길이 열렸으니 잘 교섭한다면 이 경계비가 증명하듯이 잃었던 북간도를 다시 찾을 때가 올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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