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던 일이 드디어 터졌다. 늘 한강 철교를 건너면서 땜질로 얼룩진 다리를 보면서 컴컴한 지하도를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언젠가 이 다리가 이 굴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를 방정맞게(?) 상상해 보았는데 상상이 현실이 되어 일어났다. 그야말로「밤 새 안녕하시냐」는 귀에 익은 인사가 실감이 나는 세상이다.
사건을 지켜보는 시민들은 대체로 우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다리가 무너질 지경으로 방치한 시공업자와 감시 책임이 있는 책임자에 대한 개탄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도와 개탄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대부분의 시민들은 또다시 무너질지도 모르는 다리 위를 달려 일터로 삶터로 내달아야만 한다. 주변에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도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는 시간, 잡담을 즐기는 시간을 제외하면 누구나 제 자리도 돌아와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다름없는 일상에 몰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리가 무너진 사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한 사람은 언론 종사자, 사건을 담당한 검찰과 경찰,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정치적 지지율을 저울질하는 정치인,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다리 감시의 행정 책임자, 다리 시공업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에 개인적인 푸념 외에는 달리 대응할 길을 찾지 못하는 개개인들은 점차 주변의 일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어 만사에 무기력해지게 된다. 이런 현상을 학자들은「현대병」「소외」라는 이름으로 일찍이 진단한 바 있다.
소외된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 반경이 점점 좁아진다. 대가족이나 친족의 범위도 버거워서 달랑 직계가족끼리 만을 우리 범주에 넣은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반경은 더 좁아져서 직계가족 간에도 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원래 남남이 만난 부부 간에 계산속이 끼어든지는 이미 오래고,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냉정한 계산이 사랑을 대신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이렇게 반경을 좁히게 되면 관심의 대상은 자기 자신으로만 한정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까지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산업사회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인데도 마치 혼자서 살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묘한 사회이다. 돈만 있으면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없이도 밥을 사 먹을 수 있고 자식이 없이도 노후에 간병을 받을 수 있으며 나라가 없어도 외국으로 도피하여 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사회이다. 그런 식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돈만 벌기 위해 다리에 넣을 철근도 훔치고, 그것을 눈 감아 주는 대가로 부정한 돈을 챙기기에 바쁘게 된다. 부정이 부정을 낳게 되고 속임수가 속임수를 낳게 되면 자신이 서 있는 발 밑을 파는 결과가 된다.
산업사회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혼자서 살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속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그물망의 사회에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도로가 없이는 다닐 수가 없다. 공항이 없이는 아무리 성능이 좋은 비행기도 이륙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리가 무너진 책임을 감시와 감독의 소홀함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열 사람이 지켜도 한 사람의 도둑을 막을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관리와 감시의 철저함이 일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철저한 감시와 책임의 윤리를 확립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면 감시할 필요가 없는 사람살이의 기본을 가르쳐야 할 책임은 교회에 있다.
사람살이의 기본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물건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다리는 다리라는 물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만드는 사람과 다리를 건너는 사람 사이의 만남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 다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실 음료수, 사랑하는 사람이 타고 다닐 자동차를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감시 이전에 정성이 깃들 수 있지 않을까. 감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는 비용이 많이 들고 낭비가 많은 사회가 된다.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만연하고 사람 보기를 물건 보듯 하는 사업사회의 자멸의 논리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끼리의 사랑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면 행여「기도를 열심히 하면 무너지는 다리 위를 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그릇된 신앙심을 부채질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야말로 기우로 그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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