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마음은 있으면서도 좀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책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특별히 어렵고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또 쌓아두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인데 뭐 하러 그 짓을 하나 하는 궁색한 변명을 앞세운 때문이었다. 그러다가도 필요한 책을 찾느라 한번 씩 난리를 치는데 뭐 당장 어떻게 해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지만 역시 그때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꼭 찾아볼 책도 있고 해서 마침내 집안 한쪽 구석에 쌓아 두었던 책상자들을 풀게 되었다. 이사 때마다 무거운 책 보따리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일은 보통이지만 이 책들은 그에서도 특별히 자주 꺼내 볼 필요가 없다하여 20년 가까이 두 세 번의 이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사 때 포장했던 그대로 언제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버려져 왔었다.
겹겹으로 먼지를 둘러쓴 상자들을 하나씩 풀면서 나는 작은 흥분 같은 것을 맛보았다. 오래된 유물을 발굴할 때처럼 그 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였다. 그러나 막상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은 잔뜩 술기를 먹었거나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그래서 아직 바람은 차지만 햇볕이 화사한 옥상으로 책들을 옮겨놓고, 예전 사람들이 오랫동안 방 안에 보관하던 책을 들고 나가「거풍(擧風)]이라 하여 바람을 쏘였던 것처럼 한 권 한 권 펼쳐가면서 다시 정리를 했다.
거풍을 하는 동안 하나 둘 옛 추억들이 떠오르고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아득한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어렸을 때 밤을 새가며 읽었던 소설과 시집들, 어렵게 사 모았던 고전들, 그러고 직접 저자가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증정한 책들이 거기 있었다. 지금은 비록 빛이 바랜 얼굴이지만 이들 모두가 나의 성장을 도와준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버리기가 아까워서, 게을러서, 혹은 금방 이사할 계획이 있어서 등등 집집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요즈음 주위에서 보면 이삿짐을 미처 풀지 못하고 사는 집이 많은 것 같다. 한 집에 오래 사는 것으로 오히려 이상하다고 보는 세태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공간이 그만큼 여유가 없어진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편리하고 좋은 물건이 자꾸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된 물건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 것으로 들여놓는다.
이러한 풍조를 두고 발전을 추진하는 사회의식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도대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도망꾼이나 피난민처럼 되어버렸나 놀랄 때도 있다.
우리 모두가 범죄자이고 전쟁 중인 것도 아니니 도망꾼이나 피난민이라는 표현은 물론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존을 위해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 현대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그 성격의 차이가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류는 농경정착민과 유목민으로 확연히 구분이 되어있었다. 이동생활에 기반을 둔 유목민족과 정착생활에 길들여져 온 영농정착민족은 물과 기름처럼 섞여 살수가 없었다. 동유럽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고ㆍ만주에 이르기까지 스텝이라는 광활한 초원지대를 누비며 살아온 유목민들은 경제적인 이유에서 그 남쪽에 정착해 사는 농경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으며 영농정착민들은 이들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했다. 오늘의 만리장성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의 역사는 이 두 집단의 대립관계 위에서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끊임없는 이동생활을 통해 전투에 필요한 기동력과 기술을 익힌 유목민족은 영농착민들에게는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공격적이며 용맹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영농정착민에 속한다 하지만 그 뿌리는 유목민에 있다. 언어와 생활 습속에서 그러한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이삿짐을 풀지 않고 정착을 거부하는 이러한 변화가 유목민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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