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상징하는 재를 머리에 얹고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일깨워주며 참되게 사는 방법을 다시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재의 수요일, 극기와 금욕과 자선으로 자신을 훈련하고 정화하여 악과의 싸움을 새로 시작하도록 마련된 사순시기의 첫날, 그날 저녁미사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신자들이 참례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제의가 자색으로 바뀐 신부님의 강론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신부님이 신학생이였을 때의 에피소드가 강렬한 색채와 형상으로 신자들 가슴에 각인되고 있었다. 어느 해 사순시기에 외국으로 유학 간 친구 신학생으로부터 카드가 날라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카드를 꺼내 본 순간 심한 충격을 받았다. 카드에 그려진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건강하고 균형 잡힌 육체의 여자 얼굴이 해골이었다. 한 육신 안에 공존해 있는 삶과 죽음의 대비(對比)가 상식과 관념을 뛰어 넘어 준엄한 현실로 가슴에 콱 꽂혀 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잘 생긴 여자를 보아도 분심이 생기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 얼굴 밑에 감추어져 있는 궁극적인 본체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순 제3주일을 맞게 되었다. 교만하고 방자한 자신을 그동안 얼마만큼 낮출 수 있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다. 미움을 죽이고 남을 용서하기 위해 얼마만큼 애쓰고 있는지도 따져 보아야 하겠다. 이기심을 걷어내고 남을 위한 일을 얼마만큼 하고 있는지도 셈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싶다. 참회와 보속의 생활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사순시기 동안에 준비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힘에 버겁게 느껴질 때 사순절 카드에 그림으로 형상화된 삶과 죽음의 상징을 떠올려보는 것도 힘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