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송한호)에서 지난 8월 실시한 6ㆍ25 글짓기대회에서 전체 특상(국회의장상)을 수상한 김로사(16ㆍ한양여고 1년)양의 글「할머니의 소원」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잘 표현하고 있어 게재한다.
우리집은 산동네인데 뜰에서 내려다보면 동서남북으로 환하게 트여 시야에 들어오는 전경이 구경할 만하다. 낮에는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정겹게 보였고, 밤에는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사방에 보석을 깔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데 마치 은하수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할머니는 탁 트인 뜰에 서시면 마치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라 하셨고 밤에는 매일 바라보는 야경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구경을 하신다. 낮에는 앞산(해병대가 있는 약수동 봉우리)을 바라보시며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리고 발을 돋우며 고향에 있는 딸(나에겐 고모)을 생각하신다. 북에 두고 온 딸은 일도 잘 하지만 얼굴도 참으로 곱고 마음씨도 고와서 한 번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살던 이야기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하셨는데 가장 많이 들은 것이 강낭국수 이야기이다.
강냉이(옥수수)를 망(맷돌)에 갈아서 자루에 걸러 묵을 쑤어 국수를 내려 먹으면 쫄깃거리는 국수 발이 어찌나 찰지고 맛있는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이며 두 그릇, 세 그릇씩 마냥 먹게 된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87세 되던 해부터 치매증상이 생기셨는데 뜰 앞에 서시면 자꾸 헛소리를 하시곤 하셨다. 바라보이던 저 앞산 고개 너머가 바로 눔바리(할머니의 고향)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자꾸 조르시며 그곳 눔바리에 좀 다녀오자는 것이다.
한동안 눔바리에 다녀오자고 조르시던 할머니는 드디어 문 단속이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가출을 하셨다. 온 식구가 놀라서 할머니를 찾아나섰다. 그러다가 시장길 한 모퉁이에서 보따리를 안고 앉아계시는 할머니를 발견하게 되었다. 할머니를 집에 모시고 들어와서 말씀을 들어보고 우리는 웃음과 비통함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고향에서처럼 대문만 나서면 바로 산으로 가는 길이 있는 줄로 아셨단다. 가도가도 계속 집들만 있고 눔바리 가는 길목이 나오지 않더란다. 너무나 힘이 들어 지팡이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고 몇 번이나 쉬어가며 고향을 찾으셨단다.
할머니가 우울해 하시면 아버지는 머지 않아 남북통일이 꼭 될 것이니 조금만 더 참으셨다가 착실히 고모가 입을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해가지고 눔바리에 가지고 가서 살던 고향의 집도 모두 돌아보자고, 아니 고향에 가서 살자고, 할머니는 몸만 건강하시라고, 그래야만 통일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고향에 가게 된다고, 어린 애 달래듯 할머니를 달래시면 할머니는 순진한 아이처럼 웃으시며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착실히 고모를 애타게 그리다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의 무덤은 고향이 내려다보이는 휴전선 부근에 묘를 썼는데 거기서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북에서 방송하는 스피커 소리까지 잘 들리곤 한다.『할머니, 통일이 되면 고향 눔바리에 묘를 이장해 드릴게요. 그때까지 낯 설고 물 선 이 언덕에서 잠시만 쉬세요. 꼭 착실히 고모가 있는 고향 언덕에 모셔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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