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지학순 주교가 주의 품에 안겼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대로 본향을 찾아 떠나갔으니 슬플 것도 없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언제고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큰 별의 떨어짐, 그 슬픔을 달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디 사람의 마음이 그 같은 공식만으로 움직여 주었던가. 아무리 예비된 죽음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헤어짐은 슬프고 아쉽기 짝이 없다. 좁싸라기보다도 부족한 우리 신앙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그가 남긴 발자취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학순 주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시대가 참으로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어두움을 헤쳐 나가려는 그의 노력이 또 그만큼 진솔했기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진단이 먼저인지는 몰라도 그 두 개의 관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만남이 아니었던가 싶다.
오늘에 와서 당시를 돌아보면 참으로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변화를 온 몸으로 실감하며 살고 있는 시대의 눈으로 보면 역사란 한낱 구름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무상하기 짝이 없기도 하다. 당시는 유신헌법이라는 시퍼런 칼날이 이 좁디좁은 땅덩어리를 휘감고 목을 조르고 있던 시대였다. 그 누구도, 어떤 힘도 긴급조치라는 법망을 벗어나기 힘든 어두운 시대였다.
그 법망에 지학순 주교는「당당히」걸려들었다. 당시 그의 체포는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톱 뉴스로 장식될 만큼 충격파를 던져주기에 충분했지만 단지 할 일을 했다고 믿는 그에게 유신헌법의 온갖 위협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비상보통 군법회의가 내린 선고는「내란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74년 7월6일 김포공항에서 연행된 지 불과 한 달 6일 만에 지 주교는 내란을 선동하는 대역죄인으로 징역 15년에 자격 정지 15년이라는 엄청난 형을 유신정부로부터「하사」받았다.
한국교회 사상 성직자, 그것도 고위성직자가 실형을 선고받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수한 평신도와 주교 성직자들이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우리의 피어린 순교역사를 제외하면 말이다. 한 인간이 군주의 소유물이 아니라 오직 그 자체로서 존중을 받도록 구성된 현대국가 체제하에서 볼 때는 지 주교 사건은 초유의 것이 틀림없다.
지 주교의 죄목이 내란선동이었음은 참으로 공교롭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받으신 선고가 바로 같은 죄목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고통받고 억눌리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내란선동이라고 판결한 당시와 지 주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 것이었을까.
당시 공안 당국은 지 주교 사건에「보도 불가」라는 푯말을 세워버렸다. 그 해 7월14일 지 주교 사건 보도 불가방침에 의해 본보는 결간을 당하고 말았다. 유신헌법, 긴급조치하에 제작되고 있던 신문의 기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교회 장상의 체포라는 놀라운 사건을 보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얼어붙어버렸던 당시의 정직한 상황을 그대로 대변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본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신문이 폐기되는 엉뚱한 일을 반복해 당하게 된다. 연이어지는 기도회와 성명서 발표는 어렵사리 기사로 만들어졌지만 발송과정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신문이 증발하는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독자들의 항의도 항의였지만 증발된 신문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진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불과 몇명이 되지 못했다. 「입조심이 바로 몸조심」이기도 했던 바로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입조심, 몸조심의 불문율을 깬 장본인이 바로 지학순 주교였다. 어느 누구도 쉽사리 불의와 독재에 맞설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취해진 그의 선택으로 세상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독재를 논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결단이 전제되었으며 지 주교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독재와 불의를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지 주교 사건은 당시 성직자의 정치참여 문체와 그에 대한 논란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하나의 숙제로 던져주었다. 많은 이들이 정치와 사랑실천의 한계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으나 정답은 아무도, 쉽사리 제시하지 못했다. 그 문제는『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나누어주면 사랑이지만 그 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정치가 된다』는 당시의 정치 논쟁과 정식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정치든 사랑이든 이제 그에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 아쉬운 것은 정의를 향한 활화산 같은 정열도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도 이제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대가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 시대가 필요했던 행동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정의의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른다.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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