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조모님의 기일이다.
어머님 모시고 남편과 함께 성당에 가서 연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조촐하게 제사상을 차렸다.
큰 어머님을 비롯한 친척 형제들이 다 모임 가운데 촛불을 밝히고, 안개 꽃과 주홍빛 장미 몇송이 꽂은, 좀은 화사한 꽃 수반도 상 한 켠에 놓았다.
명절 때나 기일 때 많이 불러 보아서,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시동생과 동서도 곧잘 따라 부르는 성가 「주여 임하소서」를 시작으로 할머님께 대한 추모의 예를 올렸다.
가만히 지켜보시던 시고모부님께서 장모님께 술 한잔 부어 올리겠다고 하시면서 잔을 잡으신다. 남편이 얼른 포도주가 담긴 주전자를 들어 잔 가득히 술을 따루었다.
고모부님께선 살아계신 할머님께 하시듯 정성스레 잔을 올리시고, 모두 차례대로 절을 올린 후 마침 성가를 끝으로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나는 개신교에 나가면서 젯상에 올렸던 음식을 잘 먹지 않는 큰 집 식구들이 신경 쓰였다.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의식이 다른데서 오는 불편함이 꽤나 많다.
먼 지난날, 할머님의 제사를 모셔오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멀리 의정부에 계시던 시아버님께서 명절이고, 부모님의 제사가 있기에 내려 오셔서 큰집으로 가셨다.
추석날 아침, 장만해둔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준비를 하는데, 모두 빈방으로 오라고 했다.
차린 음식은 따로 두고, 옆 방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시아버님과 나는 기도조차 할줄 몰라 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절이고, 새로난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빚은 음식들을 차려놓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돌아가신 조상들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린다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명절날 부모님의 제상에 술 한잔도 올리지 못하고, 텅 빈 마음으로 돌아오시는 시아버님 뵙기도 민망하고 웬지 죄스런 기분이 되어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의논을 했다. 큰아버님께서도 안 계시니 우리집에서 조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님께선 우리에게 행여나 부담이 될까봐 걱정을 하신다.
물 한 그릇이라도 정성이 문제일 것 같아 『형편대로 정성껏 모시겠다』고 했더니 아버님께서 『고맙다』고 하셨다.
두 분의 제사를 모셔온지 십여 년.
그동안 시아버님께서도 병환으로 대세를 받고 돌아가시고, 남편과 딸애와 나 셋이 다 영세를 받았다.
지금은 기일이 돌아오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젯상의 모습을 조금씩 변화시켜,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친척 형제들과 조촐한 예를 올린다.
돌아가신 큰아버님과 정이 자별하셨던 고모부님께선, 술 좋아하시다 돌아가신 처남의 젯상에 술 한잔 부어 드릴 수 없음을 늘 속상해 하시다가 몇 차례 우리집 제사에 참석해 보시고는 기도서 책을 한번 보자고 하셨다.
책을 드렸더니 한참 들여다 보시고는 성당에 갈려면 뭐부터 앓아야 하느냐고 하신다.
어머님께서 『주의기도를 먼저 외워야 한다』고 말하시고 그 페이지를 찾아 드렸더니 『이것만 외우면 성당 갈 수 있나, 내 열심히 외워 보께』하시며 그 페이지를 쭉 찢어 안주머니에 넣으셨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 평소에 성격도 와일드 하셨지만 「예수」라는 말만 나와도 『치아뿌라』하시며 교회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이셨던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 후, 교리반에 들어 가시고 6개월이 다 되가는 지금 몇 안되는 개근상 대상자가 되시고 3주 후면 세례를 받으신다.
나는 기도서를 찢어 안주머니에 넣으시던 그 순간에, 고모부님의 손을 잡아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모든 교리를 순진하게 받아 들이시는 모습을 뵈면서, 예전의 고모부님을 생각해볼 때 오직 놀라울 뿐이다.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멀잖아 다가올 세례식 때엔, 60년 긴 삶의 여정에 부대낀 마음의 상채기 모두 보둠어 낫게 해 주시고, 당신 앞에 머리 숙이며 남은 여생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해주소서』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 드리는 내 눈에선 자꾸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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