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백화점 고객이 며칠 새 삼분의 일로 줄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놀라도 단단히 놀란 모양이다. 우수고객까지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백화점을 이용한 바 있는 사람들이 놀라고 겁을 먹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백화점의 우수고객 명단이 살인명단으로 제공되었던 이번 사건은 영화 속에서나 대할 수 있었던 소재가 바로 우리 코 앞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매스콤에 의해 낱낱히 밝혀지고 있지만 지존파 일당 살인사건의 저변이 드러나면 날수록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대한 실망의 폭은 가일층 증폭되고 있다. 문제의 백화점 우수고객 가운데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같은 국민 감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우수고객 모두를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영기업체 간부, 국회의원, 전 장차관, 기업체 대표, 언론계 간부 등등 소위 지도급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다수 포함된 이번 우수고객 명단은 지도층=있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무분별한 사치, 과소비 등의 행태가 대부분 개발 붐을 타고 벼락부자가 되어버린 일부 졸부들의「못나니 행각」으로만 치부해왔기 때문이다.
지도자급 사람들이 잘 사는 것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다. 아울러 백화점 거래액이 많다는 사실 역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명단에 오른 일부 지도자들의 항변대로 자녀들의 혼수 마련 등으로 인해 거래액이 일시적으로 크게 늘어난 사람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항변이 이번 사건으로 크게 불거진 부의 편재, 부의 불균형 문제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번 사건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틈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아닐 수 없다. 잘 사는 사람이 더 이상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바로 재화의 잘못된 사용이 우리 사회의 인간적 유대나, 신뢰, 공동체 의식 등을 깡그리 없애버린 주범 중의 하나가 되고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정석의 논리를 펴자면 잘 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존경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한다. 땀과 노력이라는 과정을 통과한 부는 증오와 경원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오직 잘 사는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잘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소중한 과정』을 간과해왔다. 땀의 소중함과 보람은 존중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무시 당하는 과정으로 우리 사회를 좀먹어왔다. 그리고 그 일에는 소위 고위 공직자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앞장 서왔다. 이번 인천 북구청의 세금도둑사건 역시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 공직사회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위 깨끗한 정치와 정직한 공직사회를 표방해온 현 정부의 다짐과 목소리를 한 방에 날려버린 이 엄청난 사건 앞에 공직사회는 도대체 무엇으로 항변할 수가 있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이 같은 사건들은 입으로 하는 정치가 만들어낸 사생아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는 우리 사회의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로 잡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정부가 관장하는 공직사회 안에서부터 정부의 행정력을 도전 받는 이 같은 도둑질이 횡행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구호, 겉만 번지르르한 겉치레 행정으로는 거꾸로 가는 세상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인간 살육으로 발칵 뒤집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되찾는 일도, 국민의 혈세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면서 호사를 부린 일부 공직사회의 삐뚤어진 공직관도 모두 정부의 주도적 결심과 결단이 선행되어야만 바로 잡을 수가 있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치부한 재화와 재화를 선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재화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정부는 행정력을 통해 보여주어야만 한다. 아울러 땀 흘려 일하고 그 대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신명 나게 살 수 있고 가진 것을 보람 있게 나누는 사람들이 존경과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케 해주었지만 이번 사건은 특히 언론이 가질 수 있는 독성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사회적 병리현상과 병폐, 문제점들을 꼬집고 파헤쳐 현실을 알려주는 언론의 순기능이 곧 역기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은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이른바 압구정동의 오렌지ㆍ야타족과 관련된 사회문제는 문제 그 자체로만 비추어졌지 해결 방안은 제시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부유층에 대한 맹목적 증오가 불거진 이번 사건은 우리 교회에도 반성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동안 우리 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혹시 우리 교회가 부유층으로 비취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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