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계절에 우리집의 멋진 추수를 자랑하고 싶다. 한 평 남짓한 대문 위의 장독대는 우리 친구들의 인기 있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오늘도 수십 번의 오르내림에「넘어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가 있지만 굉장히 높고 파란 하늘을 보고 따뜻한 별을 쬐면서 자기네들과 함께 커가고 있는 생명들을 느끼고 볼 수 있겠다는 흐뭇함으로 그 마음을 접어놓는다. 지난 봄의 일이다. 공부방의 막내이면서 아무도 못말리는 꾸러기 미숙이가 하루는 들어오지 않고 눈만 빠꼼히 보이고 숨는 모습이 길어져서『들어와』하며 나가보았더니『수녀님, 있잖아요…』뭔가를 뒤에 감추고 멋적어하는 모습이 전에 보지 못한 행동이라 조심스레 지켜보았더니 세상 구경을 한 지 며칠 안 될 작은 떡잎이 심겨진 우유통을 건네주었다.『호박이예요. 밑에는 감자고요』기계의 이기와 버튼 하나로 필요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살았던 내게 아름다운 자연의 흐름과 사물의 질서를 가르쳐주는 것에 코 끝이 찡해옴을 느꼈다. 온통 자기 세상 마냥 교실 가득히 소리 지르고, 떠들고, 장난치던 철부지가 나의 선생이 된 것이다.
생명의 귀중함과 신비를 가르치며 환하게 미소 지어 보이는 미숙에게『올해는 호박 사지 않아도 되겠네. 이거 크면 미숙이네도 주고, 수녀님네도 먹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주자.』
지금은 주먹 만한 크기의 호박이 자라고 있다. 정성을 들이고 기대한 만큼 열매가 맺어주진 않았지만 모종을 옮기고 거름을 주면서 우리의 삶도 이 같은 노력과 기다림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사의 흐름 속에서도 참된 진리와 가치에 따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기계의 이기와 인스턴트적 노력에 길들여져 사는 현대인에게 도전을 주는 부분이 있겠지만 인간으로 지음 받고 그에 맞는 생활이 곧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이 되리라고 본다. 외적인 부와 명예와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산다면 그 삶은 결코 가치로울 수, 기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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