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국가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기원한다. 이는 전제정치로 대표되던 봉건사회에서도 최소한의 명분 만큼은 국민을 위한 민본주의를 표방했음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원들이 국정을 논의하여 이를 국가의 정책으로 삼는 의회주의 원칙은 현재까지 가장 정통적인 국가 운영의 방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 국민 혹은 민중의 의사를 이들의 대표인 의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청취하는가 라는 문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불특정 다수로 표현되는 대중과 이들의 의사는 마치 자로 잰 듯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의 다양성은 현대에 있어 갖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집단행동, 청원 및 탄원, 교육 등. 특히 의사 표현을 위한 매스미디어의 활용은 현대 과학의 대중화와 더불어 이미 우리의 상식 속에 포함된 지 오래이다. 방송매체를 이용한 의사 전달, 각종 일간지, 계간지 등의 정기ㆍ부정기 간행물을 이용한 선전, 홍보 등 날로 새롭게 쏟아지는 각종 미디어는 이제 우리에게 정보의 홍수라는 비유가 결코 과장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미 거론한 바와 같이 대중의 다양성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개별적인 차별화와 더불어 집단적인 차별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은 그와 상반되는 견해를 지닌 다른 개인이나 집단을 상대하기 마련이며 이를 묵살하거나 동조시키기 위해 혹은 수용하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 중에는 무의식적인 대중의 흡수를 위한 노력이 불가결하다. 이는 보다 타당성(혹은 정통성)을 지니기 위한 명분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명분이란 도덕을 기초로 하며 도덕이란 역사를 통한 대중의 합의와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스디어의 힘이 발휘된다. 무의식적인 대중은 제기되는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이의 눈으로 파악하게 되고 그것은 이미 제기된 문제의 본질을 침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모든 미디어를 통제해야 하는가? 침묵만이 문제의 본질을 수호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설사 모든 미디어의 통제가 가능하다 할지라도ㅡ실제로 과거 독재정권하에서의 언론 통제가 가능했던 것처럼ㅡ억압적 통제는 곪아가는 상처를 보이지 않도록 덮어두는 자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 아래에는 이미 다양한 입장과 견해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화자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길이다. 중립이란 모든 사실(혹은 견해)들을 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역사가가 변호를 일삼거나 진리를 역설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유사하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루돌프 볼프만은『역사를 기술하는 이들의 과제란 지나간 역사 현상들은 인간의 실존 이해의 가능성에서부터 해석하고 동시에 이 가능성들을 현재적 실존 이해의 가능성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 그는(역사가는) 지나간 역사를 생생하게 함으로써「너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의식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현대의 미디어를 향해 던지는 충고와도 상통한다. 미디어의 역할이란 과거 혹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정보들을 실제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를 접하는 대중에겐「이것이 곧 나의 문제」라는 현실감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현실은 그처럼 담백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실례로 그간 사회를 난자했던 주사파 논쟁은 보수와 개혁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했으며 때 아닌 이데올로기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변화를 거듭하던 국정 전반을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언론은 연일 놀라운 발언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긴장을 고조시키더니 갑자기 근거가 없다고 냉소적인 자세로 돌아앉았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소와 변호와 판결을 모두 책임진 듯한 언론의 경박스러움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속에서 어찌 대중이「이것이 곧 나의 문제」임을 느낄 것이며 어찌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중함을 기억할 필요를 느낀다.『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쳐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 6~8).
다양한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사관 그리고 의사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표현을 가질 자유를 헌법에 명시된 대로 보장 받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다양성은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다 가치 있게 받아들여져야 하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할 점은 자신의 사고와 주장만을 강요시하는 편협과 아집의 꼬리를 끊어야 하는 점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애정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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