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란 국화꽃 빛깔이 더욱 선명하게 가을을 드러나게 하는 아침이다. 누가 말하여 일러주지 않아도 계절은 때맞추어 제 자리를 잘 찾아온다. 있을 때와 떠날 때를 알며 미적거리거나 매달려 애원하지 않고 의연히 다음 차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계절의 순리 앞에 부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때의 선택은 섭리안에 있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잖은가. 다만 섭리 속에 주어진 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그렇다면 어떤 곳에 있음으로써 때를 맞아 누리는 가치와 보람을 찾을 것인가?
나는 명동엘 자주 간다. 우리나라 유행의 일번지라고 말하는 명동은 그들 자존심에 걸맞게 나날이 면모가 달라지면서 활기 또한 넘쳐흐른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한 사건(?)을 만났다. 그것은 금싸라기로도 비유되는 이 거리에 놀고 있는 가게가 있다는 것과 그보다 그 가게 유리문과 철제셧터 사이의 좁은 틈새 속에서 마치 빈 집을 지키기라도 하는 양 자라고 있는 작은 풀 한 포기를 발견한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들을 둘러 보면 어느 하나 사람의 손길이 안 닿은 것 없이 번들거리고 반짝거려 티끌 하나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이름 모를 풀 한포기의 출현은 경이로운 그것이었다.
어느 짖궂은 바람의 꼬드김에 빠져 예까지 왔을까? 그리하여 이리도 비싼 땅에서 사는 호사를 누리는지는 몰라도 매연에 절은 햇살 한 웅큼, 이따금 내리는 한 줄기의 냇물로 목을 축이기엔 갈증이 너무 심했나 보다. 목을 길게 빼고 힘껏 발돋움한 키는 웃자라 한자는 실히 되어 보인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 작은 꽃망울이 벙글대서야 그것이 여름 들판에서 하얀 미소 머금고 마주보인 눈빛에 작은 손을 흔들든 망초꽃임을 알았다.
밝은 햇살 맑은 용기 깨끗한 이슬로 살던 제 본향 들녘이라면 실한 꽃대와 싱싱한 잎줄기로 얼마나 건강한 삶을 살았겠는가 무심한 행인의 옷깃에 스쳐 지금은 목조차 부러져 꺾어진 줄기 끝에 한때의 영화처럼 꽃피웠던 봉오리들이 애처롭게 매달려 나날이 시들어 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내 삶의 자리도 주님이 있으라시던 그 자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날 갑자기『아무개야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주님이 찾으신다면「네」저 여기 있습니다』하고 즉시 대답할 수 있는 곳에 내가 있는건지 아니면 저 망초꽃처럼 전혀 엉뚱한 곳에 있어 주님의 목소리 듣지 못하고 미명속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 내 삶의 지리를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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