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몰고 가다 머물렀던 정자나무 밑에는 어린 소년이었던 철이가 경운기를 세워놓고 주름진 이마 끝으로 담배 연기를 피워 날렸고 소 달구지 끌고 다니던 자갈밭 신작로는 아스팔트길로 바뀌어 있었다. 고향을 떠난 25년은 어제 같았는데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천연스럽게도 급히 질주하던 프라이드 승용차가 내 앞에 닿았다. 그 안에 탄 사람은 옛날 우리집 작은 머슴의 큰아들 정수. 정말 정겹고 반가웠지만 서먹하기도 했다.
그동안 객지에서 거칠은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온 날들은 현실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생활이었다.
크나큰 충격을 받고 하느님을 찾게 된 지 3년이건만 응어리진 가슴에 문을 열지 못한 채 말로서는 열심히 기도했지만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못했던 엉터리 신앙생활.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리 없다. 차라리 냉담이라도 해야지 하는 갈등도 많았지만 잠시 뇌리를 스쳐가는 상념 속에 작은 어제가 사라져간다.
마을에 들어서자『너 노한이 막내 아들이지』하고 반가히 맞이해 주시는 연로하신 집안 형님. 50년대 고향에서 막걸리 도가집으로 잘 살았지만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낙선하고 가사를 탕진한 채 마지막 남은 송아지 한 마리 팔아 새벽차 타고 서울로 떠난 원규 형님. 지금은 중간 재벌로 자수성가하였다. 대뜸 첫 인사가 작고하신 자네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너를 보니 눈물이 가리는구나 하는 형님 말씀에 생전 자식에게 인색했던 아버지가 이웃과 사회에 베풀었던 미덕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49년 동안 살아오면서 남에게 베풀어 본 기억은 없었다. 연로하신 원규 형님의 따뜻한 한 마디 말이 나에게 큰 교훈을 던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감하지 못한 그 말. 그 옛날 고인이 된 아버님께서 이웃과 사회에 베풀지 않고 인색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고향과 이웃과 사회에서 멸시 받고 사는 천박한 인간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용서 등 실감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의 기도는 정말 부실했다.
잠시 내 고향 뒷산에 있는 마당바위에 앉아보니 어린 시절에 앞 냇가를 바라보며 소를 먹이던 생각, 맑고 맑은 강물에서 멱 감던 일, 멱 감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정수가 살려달라고 외칠 때『엿 몇 가락 사 줄래』하고 골려대던 일이 생각나 한바탕 웃어보기도 한다. 산천도 아름답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맑은데 도회지 사람들이 피서길에 버리고 간 1회용 종이컵과 각종 비닐 조각이 고향을 찾은 나를 조금은 거슬리게 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아버지와 같은 그 뿌리가 되어 이웃과 사회에 베풀어가며 살겠노라고, 그리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노 라고 마당바위에 앉아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바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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