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경건해진다. 죽음은 또 모든 것을 포용한다. 때문에 죽음은 적과 적을 하나로 묶어주고 원수조차 용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대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화해의 메신저가 되는 셈이다. 흔히「마음이 변하면 죽을때가 되었다」는 우스게 소리를 하는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죽음은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두려운 존재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일상 가운데서도 아마도 가장 피하고 싶은 대상일것이다. 피하려해도 피할수 없는 인간의 운명、죽음을 논하는것은 그래서 힘겹고 두렵기만 하다. 무조건 두려운 대상이긴 하지만 우리가 갖는 두려움 가운데 큰 부분중의 하나는 「죽음에 순서가 없다」 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아주 빈번하게 갑작스런 죽음과 마주치고 있다. 전혀 대비가 없이 맞아야 하는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한층 더해주기도한다. 남아있는 사람도 사람이려니와 전혀 예비하지 못한 죽음은 당사자에게 돌이킬수 없는 회한으로 남게되는 경우도 있다. 크리스찬에게 있어 그보다 아타까운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살것만 같이 기세도 당당하게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너도나도、이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사람이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간혹 잘 예비한 죽음을 보는 수가 있기는 하다. 오랜 와중병에 자신과의 무수한 싸움을 거쳐 얻어낸 결론이 대부분인 이 경우는 흔히 호상(好喪)이라고 부르는 죽음일 때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자기와 때를 잘 맞추고 준비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행복한 죽음일 수도있다.
죽음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온다는 특징을 갖고있다. 너와、나를 가리지 않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곧잘 잊혀진다는 특징도 함께 갖고있다. 예고없이 덮치는 죽음에 대한 경각심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가까운 천지의 죽음으로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느새 잊혀져 버리고 만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랄수도 있다.
만일 인간이 죽음만을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나 저제나 죽음만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생각만해도 아찔한 노릇이다. 매일처럼 죽음만 생각하며 산다는 것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예비한다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하루 한번쯤『내가 오늘밤에 하느님께로 불려갈지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것은 죽음에 대한 단순한 묵상으로 그칠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매일의 예비가 될수도 있다. 오늘밤 내가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전제로 할때 내 생각、내 삶이 변할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우리 교회가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죽음을 철저하게 예비시킨다면 아마도 이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맛볼수 있을지도 모른다.역설적 표현이긴 하지만 죽음을 예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선 이 세상이 한층 밝아질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친 욕심도 부리지 않을것 같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도 줄어들것만 같다. 내것만 챙기려는 얌체족도 더이상 활개를 칠 기분이 나지 않을것이고 폭력과 살인이라는 단어는 사전속에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있다. 도둑도 없을것이고 미움과 갈등이 사라질 것이며 시기와 질투도 더이상 존재할 가치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난폭운전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공포속으로 몰아넣던 살인 운전자들이 자취를 감춰 버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될것이다. 『오늘밤 하느님께서 내 영혼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르는데 미움이 웬말이며 욕심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결코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다. 교회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교회정신을 따르려는신자들의 태도에 따라서、얼마든지 실현이 가능한 이야가 될수있다.
오늘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우리사회를 휩쓸고있는 전도된 가치와 황금 만능주의는 사라질것이 분명하다. 땅끝까지 곤두박질친 인간의 값도 원상 회복이 될지 모를일이다.
매번 맞이하는 위령성월이지만 올해는 어쩐지 마음이 더욱 심란하다. 이 세상의 종 말을 예언하며 많은이들을 현혹시켜온 종말론자들의 헛된 꿈이 무산으로 지나간 그 뒤 끝을 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부 몰지각한 「선각자」들이 벌려놓은「휴거」라는 사기행각은 여러 사람들에게、많은 가정에 다양한 상흔을 남기고 있음을 속절없이 보고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오직 한분만이 아시는 그 날과 그때를 점치는 사람들. 그들의 횡포를 더이상 방관해서는 안될일이다. 때문에 크리스찬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이 더욱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크리스찬이 추구하는 인생의 마무리는 「좋은 끝마침」 이다.
좋은 끝마침、곧 선종(善終)이다. 좋은 끝마침으로 가기위한 지름길은 인간답게、아니 크리스찬답게 사는것이다.
유난히 노약자들에게、또병약한 이들에게 한없이 두려운 계절이기도한 이 가을에 우리 모두 죽음을 생각해보자고 권고 하고싶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라는 위대한 진리에 도달할수만 있다면 죽음은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 사랑하는 이들의 선종을 지켜보는 당신을 내일,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선종을 지켜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나、내일은 너」아니「오늘은 너、내일은 나」가 될 수도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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