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을 홍산으로 물들이던 단풍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더니 이제 나목의 모습 위에서 아래로 소식을 전할 모양이다. 신의 섭리 안에서 이런 대자연의 법칙을 지켜보노라면 나 역시 대자연의 한부분임을 생각게 한다.
퇴색되어가는 잡초들에서 시들어가는 장미꽃에서 어수선히 거리를 뒹구는 낙엽들에게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수 없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가 다니는 길가를 외롭지 않게 해주던 코스모스를 지금에야 그리워 하듯이 내 지나가 버린 세월을 그리워 하는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닌듯 하다.
그렇게 만물은 변한다고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변화라는 법칙은 시작 마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과 죽음! 이 명제가 오늘 나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것은 계절 탓 이런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괜히 힘 빠지는 일이고 삶은 싫은 일이기에 낙엽을 책갈피속에 묻혀 어둔 단풍잎처럼 묻어두고 말일인가. 이런다고 운명적인 죽음이 나를 피해간다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그러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인생을 생각하니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죽음의 문제를 대하는것이 내가 살아가는데 의미와 힘이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의 원인은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죄라고 한다. (로마서5장) 원래는 죽음이 없었는데 죄 때문에 죽음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 그러면 죄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길래 인간의 운명을 죽음의 존재로 바꾸어 버렸는가? 죄의 본질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란 교회나 종교적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 자체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 첫 인간 아담과 이부가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않고 뱀의 말을 믿어버린 그런 불신을 의미한다.
또한 죄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오만이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되어 모든 인간위에 서게되고 마침내는 하느님마저 항복하고 자신이 신으로 군림하려는 것이다. 더불어 죄는 끝없는 욕망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을 등지고 피조물에게로 생의 목표를 향하게 된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생명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기존재와 생명의 결핍을 느낄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난다. 이것은 그 자체가 이미 내 스스로 생명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느님을 등지고 죽음을 택한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요 반항이며 생명자체이신 하느님을 다시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온 인류는 「누가 이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것입니까?」라고 의식적으로 흑은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 인류의 비참한 물음에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명백히 대답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당신 생명의 영역안에 영원히 살게해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의 전 인류의 사도 바오로처럼 「죽음아 네 정체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게 된것이다.
슬기로운 사람들의 관심사는 상가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참 치장에 있다는! 옛 성현들의 말을 생각하며 현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때 어미품으로 부터 받은 몇그람의 갸날픈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 뿐이었고 무덤에 갈 때 역시 나무 몇조각과 입은옷 한벌과 한평의 땅에, 부자든 빈자든, 초라하고 가난하게 묻히고 말지 않는가?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말씀에서 희귀(回歸)의 인생여정을 받아들어야 할것이다. 서른해를 살다가도 이른해를 살다가도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인생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겠다. 어느 책에서 읽은 「15분」이란 단막극이 생각난다.
내용인즉 무대위에 휘파람을 불며 의사가 등장한다. 침대위에 누운 청년을 진단하더니「당신의 생명은 15분밖에 남지 않았오」라고 선언한다. 그때 청년에게 재산상속의 편지가 도착한다.
기쁨에 넘쳐있는 그에게 의사는 「이제 십분 남았소」라고 일러준다. 그때 내일 결혼하자는 애인의 편지가 왔다. 흥분하는 청년에게 「오남았소!」라고 일러준다.
그때 박사학위 논물 통과의 편지가 왔다. 청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는 앞으로 푹 쓰러진다.
양손에 쥐고있던 편지들이 쓸모없는 휴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해산을 위해 미리 미역을 준비해 놓은 어머니들의 지혜를 알면서 불가피한 죽음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자세로 죽느냐가 곧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해 주는 것이 아닌가. 잘산다는 것은 멋진 죽음을 맞을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시기에 지금도 살게 해주시는 축복을 내리고 계시는가? 깊어가는 가을밤과 함께 이런 상념들에 젖으면서 멋진삶, 멋진 죽음을 생각해 본다.
오늘 이 시각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지금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이 다 가기전에 얻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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