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안에서 볼때 「구텐베르그」에 앞서 활자를 발명하고 발음기관을 본따 한글을 창안하고 그렇게도 영롱한 청자를 구워낸 우리 민족의 문화는 비록 그것이 짤막한 언급에 그치고만 아쉬움은 있으나「토인비」옹에 의해 극동문명의 뚜렷한 줄기로서 분명히 지적될 만큼 독창적이고 고결하다.
일반적으로 문화의 핵심은 예의와 법도와 질서와 성실성으로 이루어 진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들의 일상 예의범절이 참으로 따를만 하고 본받을만 했던것을 뚜렷이 기억한다. 금성산 중턱에 있는 다보사(多寶寺)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시는 외조모께서 산에 오르기 전 며칠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시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음식을 가리고 말씀을 삼가하는중에 수일을 지내신다. 그날이 오면 이른 새벽 동이 틀 무렵 첫닭이 울고나서, 붉은 꽃이 아기자기 아름다운 백일홍과 우거진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산기슭 동네 샘물에서 길어온 첫 깨끗한 맑은 물로 조용히 몸을 씻으신다. 하늘이 환히 밝기를 기다려 결코 사치스러운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아끼는 모시나 무명옷을 꺼내 갈아 입고 산에 들어가고는 하셨다.
또 동네안 여느 어른들도 가진 사람 못가진 사람, 학식있는 사람 학식없는 사람할것 없이 한결같이 모두 예의 바르고 자상하고 정중하고 인정많고 또 공손했다. 그리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들이었으나 서로 나누고 또 주고 받고 했던 것을 새삼 고맙게 회상하게 된다. 물론 동네에는 무례하고 시끌덤벙한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가뭄에 나는 콩처럼 드물어서 모두가 따로 알아볼 정도였다. 행여 말썽부리거나 궂은 짓을 하다가는 동네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몇십년도 지나지 않은 요즘 세상을 보면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너나 할것없이 직장이나 학교나 성당에서 무슨 책임도 맡아 일을 하고 또 남 앞에 나서기도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변한것 같다. 남 앞에 서야할 사람이 바쁜 일상을 탓하면서 사전에 정성들인 준비도 없이 마구 한마디씩 하기도 하고, 목욕재계는 고사하고 집안에 그것도 방안에서 손가락으로 틀기만하면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샤워물 하나 제대로 끼얹지 않고 그 흔해 빠진 속옷하나 갈아입을 정성도 없이 하느님 앞에 달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원래 문화란 예의와 질서, 정성과 정교함, 아름다움과 용기있는 실행을 두고 이르는 말인데, 그렇기 때문에 문화와 동떨어진 것들, 예를 들어 무례몰염치, 거짓, 무질서, 말만 앞세우는 일 이런것들이 모두 문화와는 거리가 먼 요소이며 그런것들을 일러 반문화(反文化) 즉 야만이라고 한다.
우리 한민족은 역사가 일러주듯 한때 진정으로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문명은 외양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또는 형태적인 것의 수효나 규모보다는 오히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상과 시대정신, 예술성과 미의식, 질서와 성실성으로 다져지고 표출되는 것이다. 세상이 알아주고 우리 스스로도 자랑해 마지않는 한글과 활자문화와 퇴계학, 고려와 이조시대의 도자기 그리고 사찰건축양식, 서예와 그림 등이 그것이다. 그뿐인가 우리의 전통아악과 고유한 무용, 어른 섬기고 신의 지키는 착한 심성 등 찾아보면 실로 훌륭한 문화와 전통이 한없이 많다. 그러던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길가면서 음식을 주절주절 먹어대는 버릇을 자랑스럽게 느끼고 껌 짝짝 씹으면서 거리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잘난일로 치부하고, 남 업신여기고 우쭐대고 스승이나 선배를 몰라보는 것을 똑똑한 짓으로 착각하고, 목욕탕이나 공공장소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골프치는 시늉하고 그러기 위해 몸보신하는 것을 뽐내는 것이 우리의 웃지 못할 풍속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기차역대기실, 전차안, 공항대기실, 볼만한 명승지 구석구석까지 어딜가나 그 소음 덩어리의 텔레비전 상자와 확성기 방송소리가 막노래가락과 뒤범벅이 되어 귀가 따갑게 울려퍼지고 있다. 열차 안, 음식점, 결혼식장, 심지어는 성당에서까지 남 아랑곳없이 떠들어 대는 풍토. 이 강산에 조용하고 차분한 곳이라고는 영영 없어져 버렸단 말인가. 시끌덤벙 마구 소리높여 떠드는 것과 활기와는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것들이 말하자면 하루빨리 청산하여야할 반문화적 생활패턴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걱정하고 있듯이 이제 모두 차분하게 생각하여져 소리없이 열심히 살아갈 때가 되었다. 그만 떠들어도 될때가 된것이다. 돈버는 일, 바람직하고 부자되는 일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돈벌이 이고 누구를 위한 부(富)인가. 어느철인이 말했듯이 차라리 굶주리는 편이 포식하고 몽롱해지는 것보다 육체나 정신이나 영혼을 위해서 백배나 더 나은 것이다. 외국에서 큰 백화점이나 유명 관광지 그리고 공항에서 바지도 속옷도 아닌 어정쩡한 짧은 옷차림에 허리에 시커먼 돈띠 두르고 껌씹고 다니는 사람들 중 유색인종은 한국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문화민족이다. 예의바르고 다소곳하고 지혜롭고 차분한 성품을 지닌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다. 우리의 조상를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에 대해서만 예의 바르게 살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경건하고 착하게 살았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살아갈때가 왔다. 우리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를 너무도 잘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받았고 여기저기서 지혜로운 말을 들어 왔기때문에 지금부터 실천만 한다면 한차원 높은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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