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문지상을 가득 메운 뉴스거리는 쿠바 난민의 문제와 국내의 주사파 논쟁이다. 뉴스가 발생한 지정학적 위치가 지구촌의 이편과 저편인 만큼 사건의 내용 또한 판이하다. 얼핏 보기에 국내의 주사파들은 자유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독특한 북한식의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고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쿠바 난민의 경우에는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에서 못살겠다고 대탈출을 감행하고 있는 정반대의 지향을 보이는 사건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는 그 두 가지 사건은 공통적이며 또한 그러한 반항의 형식을 채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이 권위주의 정권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쿠바 난민의 문제는 미국과 쿠바의 대결이라는 우리의 관심을 초월하는 문제이므로 논외로 하고 우리 문제를 더 따져 들어가 보자. 박홍 총장의「자극적인」발언으로 시작된 주사파 논쟁은「주사파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가」의 문제와 주사파가 실재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로 논점이 모아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의 뒤끝은 박홍 총장 자신까지도 운동권 학생을 매일 접하는 일선 교수들의 따끔한 가르침만이 해결책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모 일간신문에 실린 어느 주사파 학생의 고백 편지를 보면 자신이 주사파의 소굴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박홍 총장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박홍 총장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모든 교수들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선도한다면「고백생」과 같은「개심」을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학생의 편지에서 우려되는 것은 타율성이다. 그 학생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가 선배들의「의식화」로 주사파가 되었고 다시 또 박홍 총장 같은 분을 만나 누구보다도 앞장서 과거를 회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식화의 계기와 의식화에서 깨어난 계기가 다 손윗 사람들의 영향이라고 한다. 스무 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면서「이것이 가장 옳은 것이다」라는 여러 가지 주장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만일 그 청년을 누군가 종말론을 강조하는 종교로 이끈다거나 극단적인 현실주의로 이끈다면 거기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지 상상이 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내 탓이요」를 강조하는 것은 가장 가깝고도 쉬운 해결책이다. 주사파 학생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학생 자신의 탓, 그 부모의 탓, 교수들의 탓으로 돌리고 반성을 촉구하면 문제가 치유된다고 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채택된 도덕율이다. 그러나「내 탓」을 강조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내게 맡겨진 선택의 여지가 얼마나 있는지가 더 문제라고 여겨진다. 내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많을 때는 그만큼 내 탓의 비중도 커지지만 내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경우에는 내 탓에 대한 자성도 그만큼 약해진다.
일전에 연변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동갑내기 여교수를 여러 차례 만났다. 그녀를 만나면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핏줄인 그녀와 나의 사고방식 행동양식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를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즉, 만일 내가 어찌어찌하여 연변에서 나고 자랐다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발버둥쳤다 해도 그녀와 다른 모습이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만일 내가 러시아에 정착하게 되었다면, 미국의 교민으로 태어났다면 또는 일본의 재일교포로 살았더라면 지금의 나와는 판이한 외양과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연변의 교포, 일본의 동포, 또는 러시아의, 북한의 동포들에게는 사회와 체제에 대한 개인의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탓이요」에 대한 자성은 큰 틀 안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우리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화국이 바뀌는 큰 틀에서의 변화를 자주 경험하는 입장에서는「내 탓」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큰 틀의 변화는 선량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날벼락을 몰고 오는 예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 탓이 많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큰 틀을 안정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역사적 책임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주사파가 없어지는 것은 교수들의 엄한 가르침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북한이나 쿠바가 얼마나 살기 어려운 나라인가를 강조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 반사적 이익은 그 의미가 약하다. 정말로 주사파가 없어지려면 주사파를 양산해낸 우리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 나아가서는 사회 지도자들의 뼈 아픈 반성이 앞서야 하고 그러한 반성을 토대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과 애정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은 권한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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