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석양을 안고 걸어가는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가늘어 보인다.
나 살아 있는 동안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뿐이라며 오늘도 언니는 밑반찬 몇가지를 해가지고 왔다. 어서 들어 가라며 종종 걸음을 치며 돌아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목이 메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아주 어려웠던 시절 나는 잠깐 큰댁에서 머문적이 있었다. 큰어머님은 돌아 셨고 할아버님, 할머님이 계신 집에 언니는 남동생들을 거느리고 주부노릇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님은 닷새마다 열리는 시골장터를 돌며 장사를 하셨는데 한번은 닷새마다 오시던 큰아버님이 오시는 날을 거르셨다. 모든 생활용품을 닷새를 주기로 마련하고 사는 살림이 한번을 거르고 나니, 차질이 생겼고 급기야 식량까지 바닥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언니가 가만히 방문을 열더니 날 부엌으로 나오라며 손짓을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그릇을 디밀며 어서 먹고 학교에 가라고 했다. 어린 소견에도 할아버님, 할머님이 걱정되었고 오빠와 동생이 걸려서 머뭇거리니까 다른 식구들은 천천히 먹어도 되니 학교 가면 나부터 먹고 가라며 재촉을 했다. 그 밥 말고는 달리 밥이 있을리 없고 다만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알고서도 짐짓 태연한 척 밥을 먹은 나는 밥을 먹는게 아니라 눈물을 먹었으며, 그때 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내가 세상을 다 사는 날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식구들 뒷바라지 때문에 학교 문전에도 못 가본 언니, 출가를 했어도 궁색한 걸 못 면한 언니는 지금도 힘겹게 살아 가고 있다. 그런 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지만 속 시원히 가려운 곳 한번 긁어 주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언니는 그런 동생이 고맙단다.
사탕 한개를 준 사람에겐 두 개의 사탕을 줄줄 알고, 한번 도움을 받으면 끝까지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언니는 정신면에 있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부자다. 내가 봄, 여름 동안 애써 땀 흘려 일했으니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 땀이 비옥했고, 내가 합리적인 영농방법으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풍작을 이루었다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수확의 계절에 다시 한번 생각해 봄이 어떨까?
때맞추어 비를 내려주시고 알맞게 햇빛 비춰 주셔서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찌는 듯한 더위에도 몸성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강 지켜 주셔서 고맙다고…, 조그마한 베품에도 크게 감사해하는 좋은 이웃 갖게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으로 서로 서로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고 서로를 추켜 세우며 사는 세상이라면 추위가 심할 거라는 올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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