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마지막 달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신자들은 11월 29일로 대림 첫주를 맞이하니 이미 새해는 시작된 것이다.
12월이면 가는 해의 아쉬움에 여기저기서 송년모임을 갖게 되니 술좌석이 빈번하게 열린다. 주변에서 며칠전 벌써 송년회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와 「그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인가보다」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다.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에선 술을 전혀 허용하기에 본인이 술을 전혀 못하는 체질이 아니 고서는 일반적인 사회술모임에 별 어려움 없이 임할 수 있다. 이맘때면 출근길마다 집사람으로 부터『몸조심해서 술은 조금씩 드시라』는 말을 반복해서 매일 듣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애주가에게야 술마시는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나같은 아마추어 애주가에겐 역시 냉냉한 계절이 역시 좋다. 혹자는 포도주 등 과일주의 기원을 노아의 방주에서 찾기도 한다. 쌓아 놓은 과일들이 자연 발효가 이루어져 와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선조들이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도 술은 있었다. 아울러 30대 초반의 한참 나이에 예수 그 분의 술버릇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감히 하게 된다.
황혼이 일찍 찾아드는 차가운 계절이다. 퇴근길 잔뜩 찌푸린 회색빛 하늘은 더욱 빨리 어두워지고 찬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술 한잔 생각이 절로 난다. 단순히 술만이 당긴다는 것이 아닌 술이 있는 자유스럽고 훈훈한 공간, 따사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의 겨울다움은 주변의 모든 색조가 무채색으로 변하는 것과 무엇보다도 가슴까지 싸하게 하는 차가움에 있다. 그렇기에 따사로움이 어떠한 아름다움이며 고마움인 지를 몸과 마음 모두로 제대로 체득케 되는 계절이기도하다. 우리의 얼고 굳어진 마음과 몸을 녹여 줄 어떤 것이 절실케 된다. 너 나 없이 바쁜 사회생활에 한참 뛸 연령층인 탓인지 며칠 전에 약속을 하기 전에는 벗들과 반가운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연히 옛친구를 만난 때의 기쁨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불현듯 전화를 걸어 서로 만나 소주잔을 기울여 나누는 날은 복받은 기쁜날이다.
그야말로 술만으로, 그리고 그 이면에 이해관계의 계산된 목적 없는 주연에,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전혀 다른 가까운 벗들이기에 우리는 마음 편히 자신의 어려운 점, 그리고 생활주변의 이런 저런 가슴저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꾸밈없이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다. 때로 마음과 가슴을 여는 촉진제로서 술은 지대한 역할을 감행하라. 술도 음식이기에 같은 자리에서 술만 아니라 생각과 마음 등 무형의 것들까지 나눔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술에대해 다소 장황해진 감이 없지 않으나 이 지면에서 무슨 술 예찬을 펼치려 함은 결코 아니다.
그날은 특강 관계로 알게된 두 젊은 미술선생들과의 첫번째로 이루어진 조촐한 술자리였다. 술좌석의 대화는 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잊혀짐이 일반적이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그날 나눈 내용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화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그의 그림에서 읽을 수 있었던 강한 원색조의 날카로운 선묘와 달리 역시 K형은 예술가답게 따뜻함과 섬세함을 지니고 있음을 재삼 확인케 되었다. 지금까지 작가가 경험한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대화가 이어졌는테 K형이 전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십수년전 시외버스 안에서 벌어진, 불과 10여분 안팎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만원 버스는 아니었고 정류장마다 멈추는 시간이 그리 철저히 지켜지던 때도 아니었다. 버스 기사가 엔지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한 노파가 무언가 머리에 인 채 버스를 향해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이 이를 발견했고 기사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버스 내에서는『서둘러 떠나자』는 소리도 한쪽에서 들려왔다. 기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저기 우리 어머니가 오십니다. 조금 기다렸다 같이 가시지요』 하니 더 이상의 이의나 다른 잡음이 없었다.
창가에 앉았던 한 청년이 그 노파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버스에서 내려 노파를 향해 질주했다. 승객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버스밖 정경에 모아졌다. 노파 머리 위의 짐을 받아 든 청년은 할머니 손을 부축하여 잰 걸음으로 버스로 되돌아왔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 승객중 누군가가 박수를 치자 마치 전염된듯 너나없이 박수가 이어졌다. 물론 이 노파는 버스 기사나 청년의 어머니는 아니었다. 동작이었으나 단순한 순간적인 엄청난 일은 아니었고 동시에 이 사실을 전해주는 K형이나 이를 듣던 나머지 두 사람 모두 눈 주위에서 촉촉함을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우리 주변에 따뜻한 정을 새삼스레 느끼게하는 보통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적지않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마치 겨울을 닮은양 너무 어둡고 무거우며 차갑게 닫혀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감지치 못하는 중병을 앓고 있는 사실에서 알아야 될 것이리라. 우정과 사랑이 담겨진 술자리가 그리워지는 이 찬 계절은 작은 촛불하나도 더 없이 따뜻함으로 우리들 삭막한 가슴에 다가오는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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