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는 민주주의, 민주화, 문민정부 등 일련의 개념들을 부쩍 자주 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에는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어떤 뜻으로 쓰이는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사상적, 정치적, 혁명적 맥락에 따라 해당되는 용어가 풍미하는 지향이 저마다 다른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민주주의의 의미분석(Denotation)과 감성판단(connotation)은 그리스도 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혁명적인 민주주의 이념들과 대결할 당시에는 오히려 이슈가 분명하였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류의 민주주의 이해는 가톨릭 사회론이 제시하는 국가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루소를 따르는 이들이 내세우던 국가 철학에 의하면, 세계는 아득한 옛날 언제인가 하느님에 의하여 생겨나기는 했으나, 그 후 세계 경륜의 문제는 세계 자체에 위임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반종교적 사상가들이 내세우던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영향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개입이 없이「자율적」으로 세계를 꾸려가도록 위임받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 대한 책임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질 의무가 없는 셈이다. 이렇게 자율성이 보장된 인간은 자기 멋대로 자기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제조건 위에 성립된 19세기식 민주주의에 따르면, 신의 자리를 대신하여 국가야말로 전능하다. 국가는 그 위로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지고지선의 존재요, 인간행동의 판단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하여 당시 교회로서는 단호한 거부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와 근대 민주주의는 19세기 내내 서로 거부와 배척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교회가 항상 옳았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구태의연한 자기 합리화 수단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앵글로-색슨계열 국가나 스위스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모범적인 민주주의에 대해서까지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2천년 가까운 역사의 도정에서 그리스도 교회는 다양한 사회형태나 정치조직들과 관계를 정립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민주적인 국가형태와 관계를 맺은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으며, 또 비교적 좁은 지역에 국한된다. 교회가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정치체제에 대하여 스스로 최종적인 문제까지 손대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교회가 꼭 발언을 해야 할 처지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교회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특정한 정치 체제나 조치들에 대하여 맞대놓고 단죄하게 되면, 세계 교회야 별로 화를 입지 않겠지만 해당 지역교회는 병적인 권력자들의「벼락」을 받아들이는「피뢰침」노릇을 면하지 못할 것은 뻔할 이치이다.
교황들은「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결같이 인간 각자의 도덕적인 쇄신과 현 상태의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들이 끊임없이 경고한 내용은 국가가 초래하는 위험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민주주의 국가가 경고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도덕적인 요건들을 힘주어 주장한 이유는 바로 민주주의가 제멋대로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계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교회는 정치 형태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꽤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의 단호한 반자유주의적인 태도에서부터 레오 13세(1878~1903)의 조심스러운 개방자세를 거쳐서 요한 23세(1958~1963)에 와서야 비로소 민주주의를 완전히 수용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교회의 태도를 갈무리하였다.
바티칸 공의회는 정치 공동체의 목표를 개인의 발전과 가족 및 사회의 완성에 두고 있다. 그래서 공의회는 국가가 떠맡은 공공복지의 책무를 다음과 같이 지정한다.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정당화되고, 그 의의를 발견하며, 공동선에서 비로소 고유의 권리를 얻게 된다.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보다 완전하게 보다 쉽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들의 총체를 내포한다』(사목헌장, 74항). 이때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비로소 민주주의가 오늘날 인간의 요구에 상응하여 인간 존엄성에 최대한도로 공헌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형태로 판단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즈음 우리 사회는「더 많은 민주주의」, 「삶 전체의 민주화」실현을 요구하며 교육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 전반에 걸친 개혁들이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고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서 곰곰이 궁리할 문제는 이 점이다. 이미 공의회 직전 두 분 교황과 공의회가 가시화시켰듯이, 교회를 포함하여「삶의 모든 분야에 대한 민주화」에 교회가 자기 자신까지도 개방할 참인지, 그래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더 이상 정치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시대정신에 교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나설 것인지의 문제이다. 1993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는「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하여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자」고 하셨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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