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국제정세는 그 어느때 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조리게 한다. 포성이 멈출날 없는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인도와 지역국가들의 종교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기아사태. 바짝 마르다 못해 손으로 쥐면 한줌의 재로 사그라 질것만 같은 어린이들의 처참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사의 욕심과 증오, 갈등과 미음을 본다.
인간의 생존이 이처럼 처절해야 한다면 과연 그 탄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속절없이 죽어가고 대책없이 파괴되기만 하는 것이 인류의 삶이라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국적불명(?)이기도한 의구심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선 떠올리기 민망하지만 무상과 아픔이 떠나지 않는 최근의 현실이 이같은 의구심을 구체화 시켜주고 있다.
다국적군의 소말리아 파병은 약간의 안도감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물론 이들조차도 소말리아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것이다.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들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풀릴수 없는 실타래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병들고 굶주린 소말리아 어린이들이 한모금의 우유라도 마실수 있는 상황전개를 진정으로 기다린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소말리아사태는 강대국들의 패권다툼 내지는 세력확장에 희생된 시대적 유물의 하나다. 어디 소말리아 뿐인가. 에치오피아를 비롯 아프리카의 무수한 나라들이 그렇고 남미가 그렇고 중동이 역시 그렇다. 바로 지난해 우리가 겪었던 걸프전, 그 이전의 이란과 이라크 전쟁,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중동의 전운(戰雲)은 구미 열강들의 이해와 패권다툼이 낳은 사생아가 아닌가.
아시아 대륙이야말로 강대국들의 노리개와 희생양이었던 뼈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동족간의 대량살륙과 대리전쟁, 장기전에 지친 미국의 패배로 목적과 명분조차 실종되어 버린 베트남 전쟁은 결정적인 본보기에 해당한다. 동족간의 상잔(相殘)으로 치자면 한국은 차라리 할말을 잃어야 한다.
거대한 대륙, 8억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의 종교분쟁은 언제나 두렵기 짝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힌두교도와 회교도간의 목숨을 건 폭력은 일단 잠재워진 모양이다. 잠재워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계속적인 두려움을 읽을수 밖에 없다. 이 두려움의 근원은 상당히 깊다. 물론 이 두려움은 2차 세계대전후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당시 파키스탄이라는 회교국가가 탄생하면서 표면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두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은 식민시대 동안 치유될수 없을만큼 깊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식민 통치의 한 방법으로 종교간의 갈등이 조장되었다는 얘기다. 독립쟁취와 더불어 터진 당시의 상황은 피의 전쟁 그 자체였다. 무저항, 비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해낸 인도의 거성(巨星), 간디조차 그 폭력에 희생된 재물이 되고 말았다.
냉전 시대의 종식은 인류에게 따뜻한 봄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문제를 유발시켜준 셈이 되었다. 강권과 힘에 의해 억눌려 있거나 억지 춘향으로 조합(組合)이 되었던 국가나 민족간의 갈등이 분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분쟁지역으로 유고가 떠올랐고 민족간의 이해와 종교적 갈등이 엇갈려 파생된 유고 내전은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랜 독재와 사회주의 국가 체제하에서도 지켜져 왔던 아름다운 보물, 유고의 문화 종교 유적들은 체제라는 억압의 고리가 벗겨지면서 무참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형제자매로 같은 언어를 쓰고 한솥밥을 먹어왔던 이들의 관계는 이름하여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다. 살상, 강간, 폭력, 미움만이 이들의 새로운 관계위에 군립하고 있을 뿐이다.
인디아건 유고건 그리고 중동이건 불씨의 중심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종교는 커다란 의문을 제기한다. 갈등과 분쟁의 원인 유발에 종교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성종교에 대한 강력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과연 이 시대의 종교적 역할은 무엇이고 어디까지가 그 한계인가.
종교가 모든 문제를 풀수있는 해결사일수는 없지만 문제유발의 원인제공을 아직도 해야 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다. 기존의 문제도 풀어나가야 할판에 문제의 중심에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아닐수 없다. 바로 이같은 물음때문에 1992년도 대림절은 더욱 큰 소망속에 기다려진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강생이 절실한 바램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그 한가지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것도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포기하면서 사랑을 찾을수는 없다. 자기의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남의 사랑을 깨뜨려서도 안된다. 우리가 찾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사랑이다. 바로 이웃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사랑이다. 역시 이웃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며 결국 자기를 죽이는 사랑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때문에.
사랑만 있다면,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이 더이상 굶주림으로 죽지않을 것이다. 사랑만 있다면, 유고슬라비아의 내전도 막을 내릴수가 있을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죽고 죽이는 싸움질도 막을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만 있다면 못할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동강난 우리 국토가 하나가 될수도 있고 갈라진 민족의 마음이 하나로 묶일수도 있다.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통일조차도 이룰수가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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