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군위를 향해 북으로 넘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비껴나면 송림사(松林寺)이고 여기서 빠른 걸음으로 두어시간쯤 가면 오솔길뿐인 산허리에서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한티성지에 이른다.
필자는 1988년 5월 24일경 성직자가 포함된 교계인사들과 역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한티순교자묘소 이장을 위한 조사ㆍ발굴팀」에 합류했다.
조사ㆍ발굴결과 한티성지는 1백 20년전까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들이었으며 처형당했던 순교지임과 동시에 그 분들의 시신이 그대로 묻혀 있는 곳이라고 재확인됐다.
한국에 성지가 많지만 교우촌ㆍ처형지ㆍ묘소의 3요소가 한자리에 있는 성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ㆍ발굴작업을 한지 4년반이나 지난 오늘에도 그당시 느꼈던 참혹함과 전율이 나의 신앙에 대한 경이를 새롭게 한다.
이에 1868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처형모습과 생활상 등을 그날 느낀대로 사실대로 재현하여 보고한다.
처참한 살육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전날밤 한티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가산(架山)의 산무리에 당도해 있던 대구감영(監營)의 포졸들은 동녘이 터자마자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저 골짝 옹기굴에는 누가 살고 이 골짝 숯굴에는 내일 군위(軍威)장에 내다 팔 숯포가 얼마인지 훤히 조사해둔 터라 토끼사냥하듯 포졸들은 이리뛰고 저리뛰며 항거하는 교우들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었다. 독안에 든 쥐잡듯 땅짚고 헤엄치듯 포졸들은 얼마나 신바람 났을까.
사람사냥이 끝난 포도대장은 졸개들과 잔치 마련이 한창이다. 오랏줄에는 제대로 먹지를 못해 여윈몸들이 굴비엮듯 주렁주렁 엮어져있다.
『이놈 그래도 천주인가 뭔가를 믿겠는가』 곤장소리와 노성은 잔치판의 풍악이다. 『왜 말이 없는가. 저놈이 말을 들을 때까지 매우 쳐라』 시대극에서나 많이 보는 장면이 한참은 이어진다. 단 한마디 『믿지 아니합니다』하면 국이며 밥이 양껏이요 정든 고향도 단숨인데 그 한마디를 못한 죄로 온산이 진달래로 덮인 1868년 봄의 한티골은 순절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당시의 한티는 울창한 숲과 우악새에다 넝쿨이 줄기 줄기 얼켜 짐승도 힘겨워하는 골짜기였고 주민들은 옹기를 구워 한밤중에 내다팔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면하고자 갈아 놓는 밭에서 나는 넉넉치 못한 푸른것들에 의지하고 있었다. 집이라고는 땅과 맞붙은 갈대지붕에, 남의 눈도 피하고 만만찮은 바람도 겁이나 문을 개구멍만하게 달아 대낮에도 캄캄한 토굴이다.
밟혀도 짓이겨져도 믿음으로 인한 기쁨으로 이런 것들은 오히려 기쁨이었으리.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가. 파헤쳐진 묘1기는 더 갈수도 없는 비탈길의 마지막 부분에 있었다. 서 있기도 힘든 곳을 어느 분이 이토록 정성스레 발굴하셨는지 누워있는 백골(白骨)을 쳐다본 순간 나는 더이상 서 있을수 없어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시신(屍身)의 목이 없었다. 아니 목은 허리 춤에 찬듯 아랫도리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단칼에 베였는지, 아프시지는 않았는지 목뼈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부서진곳 없이 숫자도 맞고 살점만 곱게 칼을 받은듯 하였다. 이 분이 누구신지 몇살이신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한채 일어나지를 못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또 어느 분이신가 재촉하였다.
그 분을 따라 솔가지에 눈을 찔리며 미끌미끌 허겁지겁 산길을 탔다. 이곳도 묘가 있을수 없는 가파른 곳이었다. 이번에도 목은 제자리가 아니라 아예 발꿈치부근에 놓여져 있었다.
묻으려면 곱게 묻지 아무곳에나 아무렇게나 이럴 수가 있는가.
뜨거운 것이 끝없이 흘러 나왔다. 이것보소 이분은 외롭지 않네.
딱 6~7세는 됨직한 어린이의 하얀 뼈가 평평한 땅위에 어미옆에 꼭 안겨 있는듯 놓여져 있었다. 사내아이였다. 머리뼈에는 상처가 있었다.
『내가 왜 해부학을 공부하여 이런 험한 꼴을 보는가』고 혼자 중얼거리며 도살장에 소끌려가듯 당도한 곳은 산아래 다른 마을의 입구였다.
뼈는 뼈 같은데 무언가 이상 하다는 일행중 한 사람의 말이었다.
꽥소리 지르지 마소, 소 열무 썰듯 사람을 아랫도리에서 한번 「댕캉」 작두질하고 발목에서 또 한번 「댕캉」하여 긴 뼈만 두개가 가지런하였다.
『개 새끼들』 큰소리 지르듯 외쳤는데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봄의 햇살은 헤프다. 또 한 줄로 길게되어 다시 산으로 오른다. 마지막으로 두시신(屍身)이 합장된 듯 한곳에 닿았다.
한눈에 여자임을 알아 보았다. 나이도 많지 않았다. 누군가가 『처녀이지요?』하였다. 그래서 힘 없이 한번 웃었다.
한 처녀는 얼굴 뼈가 짓이겨져 있었고 다른 한 처녀는 머리통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이건 창으로 찔린 구멍, 이건 몽둥이로 맞은 상처』 내가 외치는 말에 나를 둘러싼 분들의 눈에 광기(狂氣)가 엿 보였다.
『죽일 놈들!』 이번엔 내가 아닌 남이 그것도 여럿이 함께 소리질렀다.
『죽일 놈들』 나도 따라 하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어떤 신부님이 (그날은 하도 놀라 어느 분인지 이름도 기억 못한다) 이 분들의 나이는 꼭 알아야 겠다 하시기에 손수건에 고이 싸서 가져온 이빨 두개를 X-레이로 연령감정한 결과 한 분은 19세, 다른 한 분은 23세 전후였다.
한티의 순교자 거의 모든 이의 뼈가 1백 20년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색이 변하지 않은 것은 그 골짜기의 흙탓인지 주님만을 따르다 가신 님의 순결탓인지 우리로선 답을 내릴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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