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열기로 팽팽하던 캠퍼스는 겨울과 함께 방학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깊은 정적 속에 빠져 들었다. 온통 어수선했던 일체의 움직임과 소리들이 일시에 정지하고 거짓말처럼 학교 전체가 적막한 산사(山寺)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이런 날 아침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햇살과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황소의 등가죽처럼 누런 빛으로 흙을 덮고 있는 잔디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외마디 울음소리를 남기고 날아가는 새들뿐이다.
그동안 미뤄오던 기말고사 답안지를 채점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선생님은 언제나 어려운 존재였지만 한편 부러운 분이기도 했다. 특히 시험 때가 되면 우리는 죽어라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선생님들은 감독만 하면 그만이니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했었다.
시험 감독을 들어왔던 선생님들 가운데는 재미있는 분들도 많았다. 아예 책상이나 의자위에 높이 올라서서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며 숨도 크게 못쉬게 한 분이 있었는가 하면 나는 뒤에도 눈이 달렸으니 엉뚱한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엄포를 놓으며 실제로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들을 쪽집게처럼 잡아내던 분도 있었다. 어쩌나 귀신같이 알아 차리는지 한동안 우리는 정말 그분의 머리뒤에는 눈이 달렸다고 믿을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또 어떤 분은 책만 한권 달랑 들고 들어와서는 감독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 시험시간 내내 그 책을 보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감히 부정한 행위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막상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감독을 처음 들어갔을 때 이건 정말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우선 학생전체를 무슨 죄인처럼 여기고 의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다 부정행위를 한 학생을 적발해 냈을 때의 그 씁쓸함은 좀체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독을 적당히 한다거나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시험시작 전 간단한 주의를 통해 아예 부정행위를 단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었다. 공연히 감독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보느라 시간을 보내고 속을 태우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가 공부한 것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그래도 행여 유혹을 받을 물건들은 가능한 한 멀찌감치 놓게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그들의 긍지와 자존심에 호소를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험감독은 내가 동경했던 것만큼 즐거운 일은 아니다.
시험은, 근원적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그것을 보이는 사람이 똑같이 즐거울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고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즐거워하건 말건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올해도 시험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제 대학입시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고시 기술고시, 자격시험, 취직시험, 승직시험 등 수많은 이름의 시험들이 곳곳에서 정신없이 치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에게 부과된 한두가지씩의 시험을 보아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되어있다.
며칠 전 실시된 그 치열한 대학입시를 바라보며, 시험이 뭐길래 하는 한숨어린 질문을 던져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놈의 지겨운 시험, 어서 빨리 시험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시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목숨을 잃는 아까운 젊은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험을 마치 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대가 있고, 경쟁을 해야 하니 어쩔 수는 없다고 하겠으나 시험의 참다운 의미가 친구나 동료들을 짓밟고 물리치는데 있는게 아니라 평소에 쌓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정정당당하게 평가받는 기회라 생각한다면 시험이 전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시험제도의 잘못으로 돌리는 주장에도 찬성할 수 없다. 시험제도가 아니라 시험에 대한 기본 인식의 잘못이 더욱 심각한 것이다. 친구를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곧 자신이 쓰러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해도 자기 노트나 책을 빌려주지 않고, 자기가 공부하는 참고서를 비밀로 한다고 하니 얼마나 딱한 이야기인가.
결국 이렇게 처음부터 시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부족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뚤어진 가치관이 체질화되어 왔고, 그것이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가장 크고 심각한 고정적 병폐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나쁜 버릇, 자신의 게으름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려는 무책임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어려서부터 잘못 길들여진 시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그래야지만 부정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 노력하면 노력한대로 정당하게 얻고 평가받는 그런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제도의 개선은 그 다음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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