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보프 신부(1992년 6월 28일 사제직을 사임하였으므로 현재는 평신도)는「교회의 권력과 은총」에서 교회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 바 있다. 첫째, 신국으로서의 교회, 한 마디로 성직자들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어떤 결정도 성직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내려지지 않는다. 또한 정치는 오염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세속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둘째, 어머니와 교사로서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자선사업을 벌인다. 부유한 자들이 먹고 남은 것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베푼다. 하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셋째,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이다. 과학과 세속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교육, 경제개발, 사회개혁 등 사회문제에 뛰어든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을 제시할 뿐이다. 넷째, 가난한 사람들로부터의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해방사업의 주체인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ㆍ경제적 해방을 이루고 기초공동체를 가꾸며 교회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인정하는 교회이다.
가톨릭대학생회 지도교수를 맡고 있는 나는 젊은 대학생들로부터 한국 교회는 과연 이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받아왔다.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그들이 해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지도교수를 통해서 재확인하려는 데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 교회사 학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뜻, 그리고 70~80년대 인권과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해 우리 교회가 견지했던 자기 희생적ㆍ예언자적 실천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수치스러운 곳과 아픈 곳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일제의 강점기에 실천신앙의 모범이었던 안중근(도마) 형제를 살인죄로 단죄하고 종부성사마저도 거부하였고,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일제의 침략전쟁 말기엔 황군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의 종을 떼어바쳤고, 미 점령군의 밀가루로 신자를 양성하면서 갈라진 내 형제를 증오하라고 가르쳤으며, 천주교 재단에서 전교조 가입 교사를 해직시켰다. 87년 6월 항쟁에서 민주화의 성소로 일컬어졌던 명동성당이 지금은 민주화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검은 보수의 깃발을 나부끼고 있으며, 최근에는 찾아온 노동자들을 내몰고 있는 등의 사실들은 요즈음 우리 교회가 감추고 싶은 수치스럽고 아픈 곳이다.
조계사의 개혁회의 대변인인 현기 스님은 농성 노동자들을「손님」이라고 표현하였다. 불교 스님들은 믿고 찾아온 노동자들을 손님으로 대접하였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 불교계가 권력과 유착되어왔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의 대전환인가. 그런가 하면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회관에 경찰이 난입한 사태에 대해서『장로 대통령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한국 교회 앞에서 겸손히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야당시절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며 민중의 아픔에 함께 했던 김 대통령이 집권 후 옛 독재정권의 악행을 반복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현 정권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명동성당 사제들은 교회가「기도하는 집」이니 농성자들은 알아서 나가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스님들이 농성 노동자를「손님」 대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제들은 그들을「불청객」 취급을 한 것이다. 그 후 한겨레신문에서 조계사와 명동성당의 서로 다른 태도를 비교해놓은 기사가 발표되고 나서야 사제들은 회의를 열어 농성 노동자들이 성당 구내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는 것이다. 언론의 눈치나 살피는 구차스런 결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조 지도부가 파업 해체를 결정하기 직전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원로들이 농성장에 찾아와서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는커녕 시민들의 발을 묶고 경제를 파탄시키면서 파업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공권력으로 강경 대응한 정부도 비판하셨지만, 노동자뿐 아니라 정부의 태도 변화도 근본적으로 요구할 생각이었다면 농성장에 와서 파업을 그만두라고 훈계하시기 전에 먼저 대통령이라도 면담하여 협상을 종용하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70~80년대 혹독하였던 군사독재정권시절 이 땅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이자 정의의 대변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던 우리 교회를 국민들은 이제 실망의 눈으로 보고 있다.『사회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교회로부터 외면 당할 때 과연 교회는 제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는, 농촌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가톨릭학생회 대학생의 질문 앞에 평신도 집단의 지도자로 자리하고 있는 나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 5)는 성서적ㆍ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 누르는 자들의 교회가 아닌 눌린 자들의 교회여야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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