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가히 위기상황으로 번지고 있다. 이쯤해서 우리는 과학 기술의 개발과 사회경제적 제도의 궁리만으로는 그 해결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환경 위기의 극복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과 환경윤리에서 한 바탕의 발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용납될 수 없음에 동양의 전통사상과 서구의 다양한 철학 사조들이 망라되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환경문제는 직간접으로 과학기술과 얽혀 있다. 그런데 근대 과학은 17세기 서구 기독교 문명의 소산으로서 성서적 자연관에 바탕하여 일어났다. 16∼17세기 과학혁명의 주역들은 신이 창조한 세계에 신의 섭리 즉, 자연의 법칙이 내재한다고 밀었기에 그것을 찾아내는 일에 천재성과 열정을 바쳤고 그 내용이 근대과학을 형성했기 때문이다.「신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듯 그들은「신의 작품인 자연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그 과정은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부터 기계론적 기계관으로 이행하면서 일어났다. 고대 이래의 서구의 유기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은 신적 속성을 지니고, 발생과 성장을 거듭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성격을 띤다. 그 속에서 모든 구성 요소는 상호 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마치 동양의 천인합일사상을 연상케 한다.
한편 신을 제작자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은 우주 기계로서 신의 보살핌에 의해 유지되며, 자연으로부터 신성이 제거된다.
이런 연유로 성서적 자연관은 환경 윤리에서 치열한 논쟁을 빚은 주제였다. 대표적으로 1967년 화이트(Lynn White, Jr.)는「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에서「과학 기술에 의한 자연의 착취가 자연 지배의 성서적 자연관에 깊이 연관」되며, 그런 태도가「기술을 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개신교 국가들에서 환경문제가 더 두드러진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이런 화이트의 견해는 기술 결정론적 편견이라는 요지의 거센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그 논의에 서 그리스도로부터의 이성 중시의 인간중심적 자연관이 원인이라는 것, 근대 서구산업사회의 자본주의가 사상적 요소보다 더 결정적으로 환경을 훼손했다는 것, 비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도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등의 반박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성서 속에서 자연이 찬양되며, 자연이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의식이 뚜렷하다는 반증이 제시되었다.
가톨릭교회가 환경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룬 문서는 1990년 1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하는 평화」제하의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였다. 여기서는 현재 대두된 전 지구적 환경문제가 개인과 국가의 탐욕과 이기심이 빚은 도덕적 타락에 연유하는 것으로 생태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향락주의ㆍ소비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고 신앙의 본질인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사람들의 교파간 협력이 절실함이 지적되었다.
가톨릭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강조한 전통은 면면히 이어진다. 기원 6세기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도는 경외심과 사랑으로 자연을 보살필 것을 가르쳐 베네딕도 수도회는 땅을 살리기 위해 곡물의 윤작법을 개발하고 습지에 도랑을 파고 전 유럽에 걸쳐 삼림을 키웠다.
13세기 아씨시(As―slsl)의 성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 사랑의 징표로 보아 그것들 자체의 존엄성을 믿었다. 그는 인간이 지구 공동체의 일부로서, 그 형제 자매인 자연의 온갖 피조물이 주님 앞에서 공통의 존엄성과 동등성을 갖는 존재임을 전파하고, 자연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 속으로서의 인간의 일치를 몸소 보였다.
지난 90년의「창조주…평화」메시지에서 성 프란치스꼬는 자연환경을 살리는 사람들의「천상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자연에의 존경과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자선을 통해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훌륭하게 헌신할 수 있음을 증거한 성 프란치스꼬의 믿음은 오늘의 우리 시대가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복음이다.
환경문제와 관련된 여러 차례의 강연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도「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의 파괴는 곧 인간의 심성과 도덕성의 파괴」이며,「자연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의 길」임을 깨달아 모두가 의식과 생활 개혁에 나서야 함을 일깨웠다.
구체적으로 가톨릭교회 내에서는「하늘땅물벗」모임 등이 결성되고「푸르름을 만드는 잔치」등의 정기행사로「백 마디 말보다 작은 일 한 가지라도 실천에 옮겨야 함」에 나서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들 움직임을 기둥으로 여러 사람들의 작은 행동이 모여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열절한 마음으로 증거해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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