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은『너무 많이 사놓았으니 이를 어쩌지. 신문, 방송이 떠들어대기에 샀더니…』다른 사람은『정부에서 안보 얘기가 나오기에 전하고는 다르겠거니 하고 믿었었지. 아주 중요한 일이잖아? 민심을 희롱하지는 않을 줄 알았지…』『나도 불안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지. 괴로웠다구. 가만히 있자니 멍청한 것 같고, 달려가 사자니 더 멍청한 짓이고』. 이런 심정을 누군들 갖지 않았겠나.
누구도 속단할 수는 없다지만 무책임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외교를 내세우자는 것인지, 카터의 수완을 높이자는 것인지, 외국의 보도를 믿으라는 것인지, 우리의 외교를 믿으라는 것인지, 정말 위기라도 닥친 것인지, 그럴 듯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위기나 불안이 누구를 원망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는 며칠이었다.
1929년 뉴욕에서 라디오 방송이 가상 종합구성 프로그램인「화성인의 침입」를 방송했었다. 이 프로를 청취한 뉴욕의 시민들은 피난하느라고 소동을 벌였다. 실제 상황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동이 일어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적 조건이 이를 소란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은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인 경제문제와 위기적 사건이 계속 보도되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보도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외계인의 습격을 가상한 드라마는 현실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간간이 가상의 드라마라는 설명을 하였으나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방송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도 있지만「방송의 테러」라는 지적도 된다. 언론이 가하는 테러로「평화의 댐」도 우리를 무력하게 한 사건(?)이었다. 정부와 언론이 합작으로 빚어낸 우수한 작품이었다.
불감증과 과민증에 대한 얘기이다. 두 가지 증세가 건강한 상태는 아니다. 정신적 질환으로 판단되는 증세일 것이다. 불감이나 과민도 정신적 불안에 기인되는 질환으로 설명된다. 두 가지 질병이 서로 다른데 동시에 발생한 괴상한 병이 돌고 있다. 불감증세에서 과민증세로 전환된 시간도 매우 짧았다. 더욱이 두 가지 증세가 합병증세로 나타났다면 이는 위험한 지경까지 간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증세가 나타났었다.「안보 불감증」에서「안보 과민증」이 그 것이다.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증세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렇게 전이시킨 주범이 있다. 실제 상황의 변화도 있겠고, 과대하게 자극적으로 꾸민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언론 보도가 주범인지, 그럴 듯하게 말을 꾸미는 사람의 재간인지, 그런 놀음에 놀아난 사람들의 잘못인지, 구구한 해석이 난무하는 꼴이다. 불안과 나태가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모습을 우리는 누구의 잘못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내 탓이오」로 돌리기에는 정말 억울한 감이 든다. 언론의 판단이 사회에 파급되는 영향을 시험하기에는 지나친 장난이다.「월드컵」이 또 다시「안보 불감증」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국무총리는 한 방송사와 대담에서『전쟁에 대한 만에 하나에 대비한 비상 식량을 준비하는 필요성은 있지만 사재기와 같은 과민반응은 잘못』이라는 얘기이다. 또『많이 사놓은 사람은 나중에 처치하는 데 고생 좀 할 것』이라는 다른 얘기도 있었다.
약삭 빠른 민심으로 보아야 할지, 정부가 벌이는 외교에 대한 불신인지, 언론의 집중(?) 보도 탓인지 온통 어지러운 꼴을 보였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아무런 해석이나 설명없이 안보의식을 들고 나온 언론의 과잉보도(특히 전쟁 가상 시나리오를 전재한 조선일보)가 일시적 혼란을 끌어들인 셈이다. 정부의 태도, 언론의 행태, 시민의 반응이라는 3박자가 일부이지만 잘 맞아떨어진 예를 남겼다. 한 방송은 흥분을 진정시키기 위한 보도로 보이는 철원지역의 농민이『우리 농민은 일에 바빠 비상에 대비할 겨를이 없다』는 담담한 표정을 담고 있다. 비상식품을 구입한 시민을 조롱하는 듯 언론의 지나친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사회적 불감과 과민 요인을 제거해야 하는 정부와 언론의 방향이 명료해야 된다.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기보다는 발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예방적 역할이 그 책임이다.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이다. 언론이 어설픈 작태를 서슴없이 연출한 꼴이다. 정부는 방관한 엉뚱한 자세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언론의 역할과 위상에 한숨 섞인 한 마디가 떠오른다.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진실을 위협으로 포위된 현실로 조작하는 데 능력을 아끼지 않는 언론이라는 칼야스퍼스의 지적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도 무용지물과 잡담으로 채우는 언론을 비난한 글이 바로 그것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와 민족 화합을 위한 기도문이 마음을 달래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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