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쯤 싱그럽고 화창한 봄을 환희하며 맞이하게 될 수 있으까.
한국의 민주주의는 하필이면 이 아름다운 봄의 계절에 중병을 앓으며 성장하여 왔는지 모르겠다.
서양의 한 시인은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떨쳐버리고 싶은 달은 5월이다.
그러나 달력을 찢는다고 상흔이 가셔지랴. 그래도 한국의 5월은 어둡고 우울한 무덤의 계절은 아니다. 유별나게 한국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이 5월에 103위 선언의 고귀한 넋과 거룩한 정신의 깃발을 저높은 곳에서 흔들어주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빈대도 콧등이 있다』는 속담이 생각나 얼굴이 확 뜨거워진다. 그날의 감격이 엊그제 같은 1년전이었는데 시성 1주년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가 본당신부 영명축일을 기억하는 자세만도 못했다면『예끼 고얀 녀석』하고 혼침을 맞으려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전주의 중바위산에는 동정부부 유요한과 이누갈다의 가족묘가 있다.
◆외제선호가 성인공경에까지
그런데 시성식이 있은후의 일이었다. 이곳을 참배하는 분들중에는 농담같은 사실이지만 신부님과 수녀님들까지 그분들이 복자와 복녀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게다가「장하다 복자여」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생선쓸개를 씹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성인성녀들의 삶이 우리의 삶에 탄력을 주고 생명력을 재생시키는 힘이 되기에는 감격의 거리가 너무 먼 것이다. 계몽과 의식교육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자그마치 103위의 성인성녀를 한꺼번에 모시게 되었으니 성인성녀「바겐세일」이라는 발칙한 망언이 나올 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탄과 후회보다 더 시급한 일은 한국 성인성녀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신학적인 작업과 영성화의 노력이다.
한국천주교는 외인부대가 아니다. 이스라엘민족의 고대사에는 심혈과 정열을 쏟으면서 자기 신앙의 조상들이 걸어온 역사를 경시한다면 그것은 조상을 욕되게하는 것이다. 서구적인 문화ㆍ사상ㆍ해석만을 존중하고 민족의 전통문화와 사상ㆍ사고를 미개시한다면 정신적 식민임을 자청하는 일이다. 개가 풀을 먹는다고 소가 되지않고 한국인이 양식을 먹는다고해서 서양사람이 될 수 없다. 외국 선호사상이 성인공격에까지 연장되어서는 안되겠다.
◆신심운동도 자격증 필요하나
필자는 조상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을 적마다 치밀어오르는 감격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조상들의 기도신심ㆍ인간완성의 노력ㆍ공동체정신은 신성한 축복임을 심장이 저리도록 느끼게한다.
죽음을 초월하게한 삶보다 더 완전한 삶을 오늘에 조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농도짙은 신심운동을 수입할 일이 아니라 한국적 신심운동을 수출할 날이 와야겠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감격시킨 것은 죽음앞에 초연한 신앙만이 아니라 사도시대의 신도공동생활을 재현한 것이다.
필자가 호소하고자하는 본심은 사도시대의 신도공동체를 중언부언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는 봉사에 헌신하는 형제들에게 상심을 주거나 그 신심운동이 교회에 공헌한 노고를 비판하려함도 아니다. 어느 신심운동의 참가자격에는 일정한 수준의 지적 경제적 조건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미(寒微)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제는「그만한」지적조건을 갖추지 못한 형제들에게도 보급이 확대되어야겠다는 것이다. 교회안에는 어떤 명목의 엘리트도、특수한 집단도 있을 수 없다.『신분과 지식의 기도하고 형제애를 나누었다』는 한국교회의 전통에 금이 가서는 안되겠다.
◆「생활고에 지친 가정」돌봐야
요즘 세상처럼 부부의 화목과 가정공동체의 강화가 요청되는 시대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가정의 문제가 있다면 경제적 지적능력을 소유한 계층보다 그렇치 못한 가정에 문제가 더 심각하다. 교회가 시급하게 관심을 기울여햐하는 대상은 생활고에 지친 가난한 가정이다.『교우들의 협동은 감탄할 정도였다.
뛰어난 미덕은 서로를 위하여 베푸는 사랑과 정성이 지극하였다』이러한 모습이 한국교회의 전통이라면 가난과 무식때문에 교회안에서마저 소외감을 느끼는 부부가 있어서는 안되겠다.
◆「집지키기 사목」되다니
교회안의 소외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곳을 더 건드린다면 농촌본당의 문제이다. 지방교구의 대부분은 농촌본당이 많고 따라서 농촌사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현상은 사목에까지 도시본당 중심의 행정에 관심을 기울이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농촌사목은 「집지키기 사목」인양 느껴지게되고 사목 인력수급이 어려울때면 농촌본당은 목자를 잃는 희생을 치르게 된다. 사회가 농촌을 외면하고 교회까지 농촌을 소홀히 한다면 농민은 삶의 가치를 어디서 보장받을까.
농촌사목의 강조와는 이율배반의 처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본당신도의 구성원이 구교우라면 그 형제들이 받는 충격은 어떠할까. 또한 박해를 피신해 농촌에 온 신앙인의 후손들이라면 심정은 어떨까.
울곳도 없는 농민들과 함께 울어주려고 공소를 찾아다니며 수없이 울었다는 어느 농촌사제의 말에 필자도 울었다.『애덕을 가지고야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천주께서도 이 세상을 애덕위에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1816년에 치명한 김종한(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의 말을 되씹으며 방주의 창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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