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잇달아 나는 사건은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어이 없는 일들이다.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한탄뿐이다.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남의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로 일삼던 모습과는 달리 심도 깊에 생각하는 사건들이었다.
『자식이 부모를 끔찍하게…』『지나다가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으로…』『교사가 학생을 취중에…』계속되는 사건의 보도를 보면서 이 사회의 기반을 생각하게 한 일들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충격이었다. 세상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인간 같지 않은 발작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사건을 놓고 남의 일처럼 얘기의 대상으로 삼는 일조차도 착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얘기를 풀어갈 재간도 한계도 없는 일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되풀이해서 질문을 던져보지만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방비책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사회의 비중이 어느 한쪽으로 몰려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 일들이 동시에 터져나와 소화불량에 걸렸는지 가치의 향배를 가늠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사건이 없는 날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여러 가지 일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사회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보며 더욱 쓰리게 한다. 애써 나름대로 원인을 찾으려고는 하지만 선뜻 그려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원인으로 지적된 내용들 가운데 최소한 하나라도 해당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보편적인 생각으로 굳어져왔다.
원인으로 엮어낸 것은 유학이라는 열풍이 몰고 온 잘못된 예와 부질없는 교육열로 가득 찬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크게는 사회의 탓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교육의 원인으로 돌리는 이도 있다. 산업화 과정, 도시화 과정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설명으로 토를 달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례껏 피해의 대상은 시민의 몫이요, 책임은 개인의 몫으로 나누어진다.
심리적·정신적 감정으로 파악하여 인격 파탄자로 그치고 만다. 원인에 대한 소극적 진단과 적극적 진단이다. 누기 이들의 횡포를 조장하였는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누가 맡을 것인가의 지적은 좀체로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반대로 바꾸어놓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책임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인의 책임으로 그들은 형벌을 받지만 사회의 책임은 그들의 행동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동안 수없이 겪어오면서 예방적 조치를 강화하지 못한 사회와 정부의 책임은 언제나 타산지석처럼 의례적인 홍보용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책임보다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는 정부의 노력과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성인의 날 등의 행사가 있었고, 방송 신문 잡지를 통해 가정의 달에 관한 많은 행사를 벌여왔고 특집도 풍성했다. 사회의 여러 단체에서도 이러한 날의 뜻을 알리고 기리는 데 열심이었다. 그러한 취지가 예방적 장치를 만드는 연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사회의 책임은 면책」이라는 고정관념은 우리 사회의 방향을 더욱 암담하게 할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떠한 사회를, 가정을 그리려 했는가를 반문하지 않고는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사회의 기대나 정부의 역할에 더 이상 기다리기는 지루하게 되었다. 우리가 찾아나서기를 희구할 뿐이다. 가정에서 부모의 깨달음도 새롭게 되어야 한다. 정부도「구호적인 신한국」이 아니라「실천적인 신한국」으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 개인의 깨우침과 정부의 깨우침이 없이는 허물어져가는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지경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청소년 주일을 맞아『청소년은 매일의 생활에서 구원의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새로운 복음화의 선교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우리는 희망과 불확실로 가득 찬 역사적 시기에 불안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교회는 여정의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이 모든 말씀들이 하느님의 자식으로 되돌아올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기운을 넣어 줄 때 가정이나 사회의 건강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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