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야~ 영미영미영미.”
지난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여자 컬링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그리고 하나가 되게 해주는 남다른 팀워크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올림픽을 보면서 우리 인생 순례의 축소판이라고 느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는 개인이 임의적으로 혼자 온 경우는 없습니다. 각 나라를 대표해서 감독과 코치, 후견인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개인 경기든 단체 경기이든 간에 ‘함께하는 스피릿’을 나눕니다. 마치 우리가 부모를 통해서 생명을 받아 인생 순례를 시작하고, 가족과 친구 이웃 간 네트워크 없이는 인생순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수많은 선수들이 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을 목표로 달리지만, 기실 올림픽 정신은 ‘(경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바라시는 거룩한 마음이라고 묵상하게 됩니다.
남과 북이 단일팀을 이루어 출전하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메달권의 실력은 결코 아니었지만, ‘남과 북이 모처럼 함께하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올림픽을 마치고 서로가 눈물로 헤어지는 모습은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에게도 진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북핵 문제와 미국의 압박이 가라앉지 않은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화해와 세계 평화’라는 화두를 대면하며 살아가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한편, 남녀 빙속 팀추월 경기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습니다. 서로 얼음판의 코너를 멋지게 돌면서 힘들어 속도가 쳐지는 선수의 엉덩이를 살짝 밀어주며 ‘함께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여자 팀추월 문제는 어쩌면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의 아픈 단면으로 와닿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을 깊이 대면하고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장원급제만을 추켜세우며 1등만을 기억했던 ‘집단강박증’에 사로잡혀서 타인을 무시하고 나만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살아오지는 않았는가요? 우리는 그런 경쟁과 성적제일주의에 빠져서, 능력과 업적을 위한 무한 경쟁에서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가도록 자신과 자녀들을 압박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웃을 짓밟고 사닥다리를 하나하나 올라가는, 정화되지 못한 쾌감을 신의 축복으로만 생각해 오진 않았는지요? 나보다 저 멀리 뒤처져 있는 형제자매를 바라보며 ‘함께 동반하는 마음’을 갖지 못 하고 살아온 속 좁은 삶을 함께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개방적인 팀(공동체) 스피릿을 살아가도록 초대해줍니다. 일방적 지시와 명령, 위계와 권위, 외압과 배제에 의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소통과 공감, 평등과 자발성, 동반과 포용에 의한 수평적 관계를 북돋아줍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대면하고 있는 고통과 위기는 성직중심주의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성직주의는 우리 모두를 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 ‘친교의 성령’께 내어맡기지 못하고 일방적인 위계적 관행으로 공동체의 스피릿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성직주의에 길들여진 사제는 평신도 위에 군림하며 명령하지만, 기도하는 사목자는 평신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권한을 내어맡기며 함께 성장하도록 동반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백성’ 즉 평신도와 수도자가 모두 능동적 주체로 사목자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참된 정화와 회심의 여정을 걷는 사순 시기에 우리는 ‘가장 미소한 이들’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는 여정을 되새겨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야전 병원’의 역할을 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하십니다. 인생살이 순례 여정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지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메달권에서 멀어진 이들이 결코 루저(낙오자)가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임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복음의 기쁨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인생살이 무대에 우리를 보내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우리 각자각자는 (세상적인 업적과 성적에 상관없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