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1927 vs 청년 2018] "전하고 싶다, 복음의 기쁨”
“3·1운동 실패로 좌절 얻은 후 조선인 청년 실업난에 또 절망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복음 전하는 매체 절실하다”
“반복된 불합격에 의한 패배감 절망 끝에서 날 잡아준 신앙
세월 가도 변치 않는 진리에 주님께서 주신 소명 깨달아”
가톨릭신문의 전신 천주교회보는 1927년 4월 1일 창간호를 선보이면서 이 땅에서 역사를 시작합니다. 가톨릭신문은 평신도 청년들에 의해 출발한 신문입니다. 1927년,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민과 결의로 천주교회보를 창간하기에 이르렀을까요?
1927년 청년은 교회사학자 김구정 이냐시오를 모티브로 했습니다. 김구정은 천주교회보 초기 편집위원으로 1930년까지 교회보 발행에 참여했습니다. 신학교 생활, 적극적인 3·1운동 참여,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과 지식인으로서 방황은 1927년 청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018년 가톨릭신문에도 청년들이 있습니다. 2018년 청년 김민지는 가톨릭신문 수습기자들의 모습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인물입니다. 김민지는 1990년생 여성의 이름으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민지의 모습에 2018년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 고민들을 담고자 했습니다.
■ 1927년 청년 김구정
-1898년생 올해 서른, 천주교회보 편집위원
어제도 술을 마셨다. 바야흐로 ‘술 권하는 사회’다. 좀처럼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질 않는다. 스물셋에 신학교를 나와 세상 속에 던져진지 어느덧 7년. 그간 구정은 여러모로 자신의 길을 모색해왔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고학했지만 부친은 연로하고 집안은 기울어가고 있었다. 결국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올랐다. ‘허긴, 학업을 마쳤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
아닌 게 아니라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구정의 친구들도 이른바 ‘룸펜’으로 하릴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927년, 대공황시대가 열리던 참이었고 일본 경제는 몹시 어려웠다. 조국 조선의 경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관료, 대학의 선생 자리 같이 배운 사람들이 할 만한 일은 이미 일본인들이 꿰차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 청년들의 실업난은 심각했다.
하지만 구정이 보기에 진짜 문제는 청년들에게 뭐라도 해보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의 실패는 모두를 좌절하게 했다. 바뀐 것은 없었고 실패의 결과는 쓰라렸다. 일제의 문화 통치는 교묘하게 조선 지식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분열을 조장했다.
비관과 허무에 침잠한 절망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구정 또한 시대의 우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저런 밥벌이를 위해 애썼지만 그 무엇도 구정의 우울을 달래주는 일, 민족과 세상을 위해 몸 바칠 일은 아니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라며 사제를 꿈꿨을 만큼 구정의 신앙은 깊었지만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전할지 또한 막연하기만 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이대로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계산성당으로 향한다. 구정이 활동하는 남방천주교청년회 회원들은 요즘 궁리하는 일이 있다. 발단은 청년회 대표 최정복(요셉)의 생각이었다. 최정복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가톨릭 타임즈’를 내밀며 우리 조선에도 가톨릭신문이 꼭 필요하다고 야단이었다. 그렇다. 교우들이 소통하고 복음을 전하는 매체가 절실했다.
‘그러나 청년들이 만드는 신문을 일제가 허락하겠는가. 그게 문젤세….’
3·1운동 이후 일제는 민족 신문 간행을 허가했으나 식민 통치에 비판적 내용을 실은 신문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정간과 폐간이 이뤄졌고 검열은 점점 더 심해지는 중이었다. 구정은 다시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걸었다.
“이봐 구정이 왜 이제 왔는가? 신문 발행 허가가 났네!” 청년회 전교부장 윤창두(요셉)의 목소리다. 뜻밖의 소식에 구정의 마음도 들뜬다. 청년회의 막내 이효상(아길노)이 원고지를 내민다. “신문이 창간되면 필요할 것 같아 쓴 글이 있습니다.” 이효상이 읽는다.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낫다! 낫다! 적고 적은 이내 몸이 고요한 첫 새벽에 그윽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왔다. 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눈이 있어도 못 보았다. 귀가 있어도 못 들었고 입이 있어도 말 못했고 손이 있어도 못 적었다. 알고 싶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구정은 함께 읊조렸다. 그렇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전하고 싶다, 복음의 기쁨.
■ 2018년 청년 김민지
-1990년생 올해 스물아홉, 가톨릭신문 수습기자
오전 6시, 겨우 눈을 뜬 민지는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부여잡는다. 알람을 끄고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대학시절 동기들의 얼굴이 민지의 손가락에 밀려 내려간다.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누군가는 태국에 휴가를 갔고 다른 누구는 다음 주에 결혼을 한다. 벌써 아이 엄마가 된 친구도 있다. 다들 잘 지낸다. 다들 세상 속에 자기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 민지의 마음이 괜스레 헛헛해진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민지의 엄지손가락이 멈춘다.
“내 안에 이미 자라난 질투를 치유하는 법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민지의 뉴스피드에 올라온 절묘한 문구. 가톨릭신문 페이지 새 글이다. 일단 ‘좋아요’를 누른다. 민지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문장이 좋아서, 아니 그보다는 민지가 얼마 전 가톨릭신문에 입사한 ‘내부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민지는 취업이 늦었다. 경영학과를 다녔던 민지는 졸업을 앞두고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준비하는 사이 몇 해가 금방 흘렀고 더 이상 졸업을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대학에 남았다. 졸업 후 대학에서 노량진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민지의 목표는 조금 달라졌다. 회계사에서 7급 세무직 공무원으로, 그 다음해엔 7급에서 9급 공무원으로.
처음엔 몸이 아팠다. 소화는 항상 잘 안 됐고 자주 찾아오는 편두통은 집중을 방해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책 넘기는 소리에조차 예민해졌고 밤에는 잠이 안 왔다. 돈은 늘 부족했다. 서른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부모님 돈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견딜 수가 없었다. 반복된 불합격이 가져 온 불안감, 경쟁에서 도태됐다는 패배감이 민지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벼랑 끝에 내몰린 민지를 지탱해 준 건 신앙이었다.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느끼던 민지에게, ‘주님은 모두에게 각자에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다’는 성경 속 가르침이 큰 힘이 됐다. 신앙 안에서 민지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회계사가 되는 것은 자신과 맞갖은 일이 아니었다. 민지의 탈렌트와 소명이 다른 곳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2017년 가을, 민지는 노량진을 떠났다. 그리고 가톨릭신문에 입사했다. 듣고 쓰는 일이야말로 민지를 민지답게 하는 일이었다. 하느님이 민지에게 주신 탈렌트는 ‘언어를 다루는 섬세함’이었다. 독서실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 동안 민지는 회계학 사전보다는 성경을 자주 들췄다. 민지는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20대 내내 계속된 시행착오 끝에 민지는 주님께서 예정해주신 자신의 쓰임을 깨달았다.
기자로서 민지는 보고 듣고 쓰는 일에 온 신경을 쏟는다. 괴롭고도 행복한 일이다. 가끔은 ‘가톨릭’과 ‘신문’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이 저물어가는 옛 시대의 유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을 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잠깐의 분투 끝에 스마트폰을 끄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오늘도 민지는 전해야 한다. 전하고 싶다, 복음의 기쁨.
정다빈 기자 melani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