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오 복음 5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다. 루카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있고 구약성경에도 소금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소금 비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회가 썩지 않도록, 주님을 믿는 이들이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금이라면, 사회적 단위로는 언론매체가 대표적이다. 물론 교회 언론매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한 달 전, 사제 성폭력 사건을 다룬 교회 매체들은 제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았다. 우선, 사실관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로는 수원교구의 특별사목서한과 주교회의의 사과문 내용, 그리고 사설 등 의견기사 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매체가 자기 독자들에게 중대 사건의 사실(fact)을 알리지 않고 의견(opinion)만 전한다는 건 매체 저널리즘의 기본을 외면한 제작방식이다.
사실관계를 왜 보도하지 않았을까? 여러 교회 매체 관계자들의 답변은 희한하게도 똑같았다.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 다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자체 독자를 갖고 있는 매체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매체 제작론이다.
당시 사건의 성격은 사회적으로 이미 ‘성폭력’으로 규정됐다. 그럼에도 굳이 ‘성추문’이라고 의미를 축소해 표현하는 매체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문제 원인을 정체불명의 ‘사탄’에게 돌리거나, 사제를 위한 평신도들의 기도 부족을 주원인으로 탓하기도 했다. 이는 사제에 대해 ‘자기 행동 결정권을 가진 이성적·인격적 주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평신도의 기도 부족을 주원인으로 탓하는 건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과는 동떨어지게, 국제적으로도 드물게 강력한 성직중심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평신도의 존재를 하층민쯤으로 취급하기도 하는 한국교회다. 이제는 사제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잘못까지 그 책임을 평신도에게 전가하려고 매체가 나서는 것인지. 이쯤 되면 글은 논점회피의 오류를 넘어 사안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 된다.
교회가 추구하는 정신과 2000여 년 전 공자의 춘추필법, 현대 저널리즘의 그 모든 취지를 종합해 볼 때 교회매체의 대응은 다음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즉, 아무리 부끄럽더라도 우선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해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그다음으로 그에 대해 평가하며, 상이나 벌을 주자는 의견을 내고, 교회전체가 회개하며 과감하게 쇄신하기를 촉구하고, 그리고 나서 모든 신자들이 사제를 위해 간곡하게 기도하길 바라는….
문제의 심각성은 이 같은 교회매체들의 제작방식이 일회성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속해온 관행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교회매체의 인식 수준이 수원교구 특별사목서한과 주교회의 사과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설사 교구와 주교회의가 앞서 나가는 행보를 취할지라도, 앞장서 소금 역할을 해야 할 교회매체 평신도들은 짠 맛을 내지 않거나 가능한 희석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성경 말씀을 따르겠다고 감히 소금 역할을 자처하면서 짠 맛을 냈다가는 버티기 힘들다는 게 역사적 경험칙일 것이다. 교회 일각에서는 소금의 ‘짠맛’을 불평·불만으로 격하하면서 ‘불평·불만 안하기 운동’도 장려한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교회 체제의 중심부 주변에 소금의 짠 맛을 내는 평신도는 남아있을 수가 없다.
우리 교회는 자랑할 만한 신앙적 유산에 나름대로 깨끗한 도덕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잘못한 일, 부끄러운 일, 불리한 일,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는 우선 숨기거나, 축소부터 하고자 하는 관성이 너무나 강하다. 이처럼 지킬만한 가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시대의 징표에 따라 버려할 폐습까지 모두 지키면서 ‘보수’를 자처하기도 한다. 그 모두가 성직주의 중심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최근 두 차례, 이 칼럼난을 통해 교회체제에 대해 짠 맛을 냈더니 몇몇 지인들이 걱정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을 테고, 곧 왕따 당할 것 같은데 조심하시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후 귀국길에 하신 말씀만 생각났다. “고통엔 중립이 없다.” 이 표현을 혼자 속으로 차용했다.
“소금의 짠 맛엔 중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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