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당 관내에 한국 제 2대 방인 사제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그의 부친 성 최경환 프란치스꼬님의 탄생지가 있고 1km 떨어진 옆마을 「다락골」엔 전국 최대의 순교자 묘지가 있다. 신망애라도 증거하듯 3군데에 도합 36기의 줄무덤이있다. 이 마을 구전과 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틀림없이 천주교 순교자의 무덤들이다. 포졸들에게 끌려가면서 엄마가 아기에게 『얘야、지금 죽어야 천당간단다』라고 달래었단다. 이런 신앙의 선조들의 무덤을 방치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경스럽다고 생각되어 개발을 시작했다. 봉분위의 20년생 소나무를 베어내고 묘비를 설치하게 되었다. 기초공사 때의 일이다. 시멘트와 모래를 실어 마을에 내려놓고 보니 능선너머에 위치한 줄무덤현장까지 운반이 문제였다.
할수없이 동리에서 지게를 10개 빌렸다. 교우라고 7~8명이 동원되었는데 그나마 대부분이 할머니같은 아주머니、아주머니같은 할머니들이고 그중에선 내가 제일 씩씩하고 늠름한 젊은이였다. 할 수 없이 내가 지게를 직접 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본당신부가 지게를 지니 교우들이 뒤에서 깔깔 웃어댔다. 결국 끝까지 지고가서 시멘트 등을 내려놓고 하산을 하니 그때서야 교우들이 제 정신을 차렸는지 너도나도 지고 이고 올라왔다.
그 지경이니 일이 진척될리 없었다. 할 수 없이 13km 떨어진 본당으로 다시 돌아와 주일교 어린이들이 하학하는대로 사발 하나씩 들고 현장으로 오도록 교우선생에게 국민학생 동원령(?)을 내렸다. 모래 한사발、시멘트 한사발씩이라도 날라야하겠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기초공사를 겨우 끝내고 며칠 뒤 비석을 올리게 되었다. 말이 비석이지 석탑이었다.
오전부터 시작하여 저녁때 겨우 끝냈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10m올리는데 두시간씩 걸렸고 온 동리사람까지 총동원되었다. 다음날、즉 1982년 11월 23일엔 묘비제막식을 거행케 되었다.
고 황주교님이 오셔서 약 10m쯤 산을 오르시더니 『난 숨차서 못올라가겠다. 그냥 돌아갈 테니 너희들끼리 그냥 해라. 이런줄 알았으면 안올걸 그랬다』하면서 그냥 내려가시는게 아닌가? 할수없이 군수ㆍ서장 등을 먼저 올려보내고 주교님앞을 가로막으며 『여기까지 오셔서 그냥 가시면 안됩니다』하고는 교우들을 시켜서 주교님을 업고 올라갔다. 한사람은 주교님을 업고 한사람은 주교님 엉덩이를 떠받들어 밀면서 말이다.
산꼭대기에 내려놓으니 업고 올라간 사람보다 업히셨던 주교님이 더할딱거리셨다.
천신만고끝에 제막식을 갖게되었다. 그런데 비석에 두른 천을 벗기는게 제막식의 알맹이부분인데 그냥 둘러놔서 그런지 잡아당기니 훌러렁 벗겨지고 말았다. 경험부족 탓이었다.
서서히 벗겨져야 하는건데! 그래서 사진촬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밖에 할일이 태산이다.
성지개발사업은 초인적인 능력、즉 하느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사업임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성역화사업을 위해 어떠한 역경도、희생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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