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돼.” 일본에서 젊은 엄마아빠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공공연하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요즘 ‘노키즈 죤’이 생기고 있다고 하지요?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마음대로 뛰어다니느라 일반 손님들에게 폐가 되므로, 아예 아이들을 못 들어오게 하는 장소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웃의 관심과 필요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 자녀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게끔 기(氣)만 살려주려는 가정교육을 받는다면, 과연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까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와 행복이 과연 참된 것인가 다시금 성찰해보게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 가치나 집단적 관행보다는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지난 1990년대 말부터 세계가치조사(WVS)를 보면, 한국의 부모들이 (집단의 권위를 존중하며 따르는) ‘순응성’이 아니라 (개인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율성’을 자녀교육의 가치로 삼겠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더 크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율성 (auto-nomy)’에는 자기의 원칙과 규범을 따르는 도덕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도덕성의 가치가 결여된 ‘개인주의’는 자기의 이해관심만이 절대화되기에, 인간 공동체에 커다란 폐해가 될 수 있지요. 더군다나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압박과 경기침체로 ‘불확실성’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각자도생으로 생존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개인주의가 만연하기 쉽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돈’이 많을수록 비례적으로 더 많이 향유할 수 있어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자유’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내포하는 가치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freedom from~),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유인가(freedom to~)?라는 근원적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유교적 서열과 위계질서가 가부장제적인 권력 문화와 맞물려 불합리하고 폐쇄적인 관행이 만연해 있는데, 이렇듯 억압적인 ‘외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저항은 오늘날 시대의 징표로 드러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징표를 읽고,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와 권익을 보호하며, 개인을 집단의 부속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의 일부인 인격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자기의 내면을 지배하는 ‘무질서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깊은 기도와 성찰 그리고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마음 깊이 하느님을 대면하는 기도가 무르익지 못할 적에 겉으론 자유로워 보일 수 있어도 속으로는 자신의 상처 안에서 무의식적 욕망의 종살이를 할 적이 많습니다. 기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의 삶(개인주의)에 갇히기 쉬운 죄인들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회심과 재생의 여정으로 초대받습니다. 더 나아가 소비사회에서 부추기는 ‘찰나적인 만족’을 행복과 동일시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절대적인 지평으로 향하는 참행복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큰 자유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자리가 참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초대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단지 2000년 전에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충만한 삶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작은 나’로부터 죽고 ‘더 큰 나’를 향해 나아가는 파스카 여정은 바로 개인주의라는 울타리를 넘어 참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인생 순례입니다.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라는 책을 집필했던 취제크 신부는 감옥에서 취조받던 중에 자기의 강인함이 모두 뭉개졌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형언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맛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개인의 무질서한 애착에 묶일 적에 자기의지와 자기애는 온전히 행복의 열매를 맺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리고자 할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 더 큰 자유와 참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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