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 추위가 지나갔다. 겨울의 찬기를 토해내듯 진달래가 꽃봉우리를 터뜨리며 앞산을 붉게 물들였다. 산골짜기마다 언제 준비했는지 푸른 잎과 고운 색깔의 꽃들을 내밀며 부활의 희망을 안겨준다. 봄의 온갖 색깔을 도화지위에 옮겨 놓는다면 서로 어우러지기에는 너무 촌스러울 것 같은데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할땐 그저 아! 하는 찬양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날로 생기 있게 변해가는 수녀원 주변을 하나하나 관찰해 보니 모든 초목들이 다 같은 시간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아니었다. 영춘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할미꽃은 벌써 봉오리를 활짝 열어 맘껏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가 하면 한여름 뜨거운 태양열 아래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백일홍은 죽은 듯 마른 가지를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다른 꽃들이 열매(씨)를 맺을 때 국화는 우아하게 그 자태를 열어 보이겠지.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라도 그의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고 영글 때까지 색깔, 시간 등의 모든 가능성은 작은 씨앗에 이미 담겨 있고 바람ㆍ해ㆍ물ㆍ땅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꿈을 펼쳐나가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한 신비에 경탄할 뿐이다.
이 비밀은 피부에 닿게 체험한 것이 작년이었다. 수녀원에서 어버이날 행사로 우리 부모님께 우리가 가꾼 꽃을 선물로 드리기로 하였다. 이른 봄에 밭을 일구고 흙을 골라 정성스럽게 안개꽃씨를 뿌렸다. 아주 자그마한 꽃씨가 들어 있는 봉투에 개화기는 오월 하순부터라고 돼 있고 행사일은 그달 마지막 주일로 점점 다가오는데 활짝 열리지 않는 꽃봉오리는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만 했다. 사람의 손으로 억지로 봉오리를 열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오직 하느님만이 자연을 통해 열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은 조화 속에 성장하여 꽃 피운 시기를 알고 따르는 지혜를 가진 것이다.
유독 인간만이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인내와 사랑으로 격려해주고 기다려주기보다는 목적한 시기에 억지로 봉오리를 한 잎 두 잎 제껴간다. 결국 봉오리는 으스러지고 꽃은 피우지도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누가 정한 시기인가?
작년 늦가을 따뜻했던 날씨에 개나리와 철쭉 몇 송이가 활짝 피었다. 아름답다는 말보다는『저 꽃은「철」이 없어』하고 깔깔대던 수련자의 웃음소리가 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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