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당 신자 모두 해미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로 했다.
날씨는 비 온 뒤의 청정한 공기로 인해 상쾌하였고 하늘엔 새털구름마저 살푸시 뜬 그야말로 은총의 날씨였다.
그런데『아뿔싸』하고 탄식이 절로 나온 것은 차에 막 올라탔을 때였다. 기도서와 성가책은 커녕 묵주조차 준비하지 않은 내 텅 빈 손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성지순례 가는 목적을 잊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등에다 육신을 위한 것만 잔뜩 짊어진 것이다. 옷이며 도시락 간식 등은 준비하면서 정작 필요한 은총을 담을 마음의 그릇은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별 수 없이 나는 남의 것을 빌려 보거나 아니면 구경꾼쯤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참 한심한 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우릴 이 세상에 보낸 목적은 당신께 영광 드리기 위함일진대 인간은 모두 그걸 잊고 엉뚱한 것들만 챙기고 있으니 그분은 얼마나 탄식하실까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내 생명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분 목적을 알고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손색이 없겠거니와, 목적 없이 육적인 것만 허우적대며 쫓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일이 없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는 신자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엉터리 성지순례로나마 따라 나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그분의 한량 없는 자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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